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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토 May 27. 2020

아빠의 어린이날 선물

5월은 지출이 많아지는 달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 성년의 날.

이런 날들을 기념하기 위해서 선물을 사고 가족들과 외식을 하다 보면 월급은 대부분 카드 값으로 빠져나가고 통장의 잔액은 초라해진다.

5월의 기념일뿐 아니라 해마다 가족들의 생일도 챙겨야 한다. 특히 아이의 생일은 절대  까먹지 말고 반드시 선물을 준비해야 한다. 아이는 마치 핸드폰에 미리 알림을 설정해 놓은 것처럼 생일 일주일 전부터 생일이 며칠 남았는지 카운트다운을 시작한다. 아내와 나에게 미리 골라둔 선물을 귀띔해주는 세심한 배려도 잊지 않는다. 하지만 부부간에는 따로 생일선물을 챙기지 않는다. 옷이나 물건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생일까지 기다리지 않고 바로 사기도 하지만 생일이라고 해서 뭔가 특별한 선물을 서로에게 기대하지도 않는다. 여자 옷이나 액세서리에 문외한인 나는 아내를 위한 선물로 무엇을 사야 할지 항상 막막했었다. 차라리 아내가 컴퓨터나 TV, 카메라 같은 전자제품, 자전거나 스쿠터처럼 내가 잘 알고 있는 선물을 요구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후각이 마비될 정도로 이것저것 향수 냄새를 맡아봐도 어떤 향이 좋은지 모르겠고, 옷이나 신발을 고를 안목은 나에게 없었으며, 핸드백이나 지갑은 터무니없이 비쌌다. 아내는 반지나 장신구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백화점 여성용품 매장을 아무리 돌아다녀 봐도 아내가 좋아할 만한 선물을 고르지 못했었다. 생일날마다 선물을 고르는 일이 심한 정신적 노동이 되기 시작했다. 결국 아내와 나는 선물 안 주고 안 받기 협정을 맺었다. 대신 서로에게 축하카드를 써주고 딸아이가 사 온 조그마한 케이크로 생일을 축하한다.


생일선물도 없는데 장미꽃 봉오리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는 5월이 되면 지름신이 강림하곤 한다. 한 시간 이상 가만히 앉아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고 있으면 세 가지 중 하나다.

물건에 대한 사전 정보를 얻기 위해 리뷰를 보고 가격을 비교하는 경우.

다운로드한 몇 개의 액티브 x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신용카드로 결제하고 있는 경우.

마지막은 언제 오는지 배송 조회를 하고 있는 경우다.

얼마 전,  방에 들어박혀 나오지 않으니 아내는 불길한 기운을 느끼고 모니터 앞에 고개를 들이민다.

" 이번에는 또 뭐야?"

"전기 자전거 바꾸려고.. “


 5년 전 5월 5일. 어린이날 선물을  받기에는 너무 늙어버린 나는 엉뚱하게도 엄마가 아니라 아내를 졸라 전기자전거를 샀었다.

"왜 어린이날인데 어른인 당신한테 선물을 사줘야 해?"

"어린이날 기념으로 10% 할인해 주거든..".


전기자전거는 처음이라 직접 매장에 가서 시승을 하고 차 트렁크에 싣고 온 후 자전거로 출근하는 자출족이 되었다. 집에서 나와 한강 자전거길로 돌아 가면 시간은  더 걸리지만 아침저녁 교통체증에 시달리지 않고, 맑은 바람을 맞으며 출퇴근하니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느낌이었다. 어쩌다 야근하고 돌아오는 날이면 많은 사람들이 저녁을 먹고 한강에 나와 산책이나 조깅을 하고 있었다. 한강 양쪽으로 빼곡한 아파트만 보이지만 번잡한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도 이런 조용한 야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그저 감사했다. 왜  수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서울에 와서 반드시 봐야 할 볼거리 중 하나로 한강 야경을 꼽는지 알 것 같았다.  


 다시 일 년이 지나 자전거에 대한 애정이 서서히 식어갈 무렵 나는 또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고 어린이날이었다.

"또 뭐 보는 거야? "

"뭐야? 이번에는 차야!"


인터넷으로 중고차를 검색하고 있었다. 다음날 나는 일산까지 가서 중고차를 시승해 본 후 차량등록을 하고 어버이날 집으로 끌고 왔다. 딱 2년만 타겠다고 아내를 회유해서 가져온 것이다. 아내와 아이를 태우고 시승한 날 이후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내 차에 동승하기를 거부했다. 아내는 차가 땅바닥에 붙어서 달리는 것 같다고 했고, 아이는 뒷문이 없고 창문이 안 열려 너무 불편하고 답답하다고 했다. 사실 이렇게 작고 깜찍한 차는 젊은 20~30대 들이 타는 차지 나처럼 가족이 있고 중년인 남자가 타고 다닐 차는 아니었다. 어쩌다 엔진오일을 교환하려고 서비스센터에 들어가면 대기 손님 중 내가 최고령이었다.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도 해야 했지만 더 이상 회사에서 차량 유지비를 받을 수 없게 되자 2년 후 나의 조랑말을 팔았다. thunder grey라는  멋진 색깔을 가졌던 그놈은 자신과 잘 어울리는 젊은 신혼부부를 새로운 주인으로 맞았다.  


 이 예고 없는 5월의 지름신이 몇 년 동안 잠잠해서 완치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불치병 같다. 이번에도 어린이날이었다.  

5년 전에 산 전기자전거의 배터리를 사려고 했더니 제조원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아서 국내 수입이 안 된다고 한다. 대신 다른 자전거가 있으니 그걸 사라고 추천한다.

“그럼 그 회사도 망하면 또 배터리 못 구하는 건가요?” 점원은 우물쭈물 대답을 못한다.


아직 자전거 차체는 멀쩡하니 배터리 없이 그냥 일반 자전거처럼 타려고 했지만 미니벨로면서도 무게가 20kg에 달하는 과체중 자전거다. 내가 살을 빼려고 작정한다면 이런 자전거를 타겠지만 느리게 가는 나를 비웃으면서 로드 자전거들이 나를 추월해 갈 것이 뻔했다. 게다가 일반 자전거로는 출퇴근이 힘들다. 중간에 언덕도 올라가야 하고, 땀을 흘리고 출근해서 샤워를 할 수 있는 곳도 없다. 이미 전기자전거의 편리함에 맛을 들인 내 몸은 종아리에 잔뜩 힘을 주면서 언덕을 오르는 고된 몸짓을 거부하고 있었다.

어차피 배터리를 못 구하니

"새로 사야 하는 근사한 이유가 생긴 것이다! "


아내는 5월이 찾아오고 내가 컴퓨터를 켜면 불안해한다. 어린이날이 하루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란다.

나중에 어머니를 만나면 물어봐야 할 것 같다.

"나 어릴 적에 어린이날 선물 안 사 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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