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에 한번 모이는 동창 모임도 기약 없이 미룬 지 일 년이 넘었다. 전화통화도 별로 없으니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수단은 카톡이 유일하고 그것도 오지랖 넓은 친구가 첫인사를 올려야 수다가 시작된다.
뻔한 이유는 ‘살기 바빠서..’
구정이지만 고향에 못 간 친구가 산행을 제안했다. 니트로 된 가디건에 야구모자를 쓴 중년의 남자들은 다양한 색상의 레깅스와 등산복을 입은 산행객들 틈에 섞여 들었다.
등산에 관심 없던 MZ세대들이 산행을 즐긴다고 한다. 북한산이나 도봉산처럼 도심 근교의 가까운 산을 선호하는데 정상에 연연하지 않고 인증샷을 찍다가 산행을 마무리한다고 한다. 데스크가 선택한 단발성 기사인지 모르지만 일몰을 배경으로 고난도의 요가 포즈를 취한 젊은 여성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들을 ‘등린이’라 부른다고 한다. ‘주린이’, ‘부린이’에 이어 ‘등린이’라니. 나이 들어 호기심과 기억력은 점점 떨어지는데 새로 배워야 할 한국어는 늘어만 간다.
그들은 노랗고 빨간 원색의 등산복 대신 운동화를 신고 레깅스를 즐겨 입는다고 하는데 한강변을 달리는 러너들의 패션을 등산로와 산 아래 파전집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날씨가 영하로 떨어지면 지금은 히트텍이라는 하이테크 한 제품명으로 불리는 쫄쫄이를 즐겨 입었다. 추위는 공평하다. ‘올해 최고의 추위입니다’라는 예보에도 불구하고 스타킹에 치마를 입은 여인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직업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이거나 유전적으로 다리에 지방이 많아 추위를 덜 타는 복 받은 체질이다.
각선미가 추위를 막아 주지는 않는다. 춥지 않은 척할 뿐이다.
쫄쫄이의 색깔은 검정이나 회색 아니면 갈색이었다. 색상과 모양은 비슷했지만 앞 트임의 유무로 남성과 여성용을 구분했다. 급하게 화장실을 찾았는데 제자리에 있어야 할 앞 트임을 못 찾은 적이 있었다. 구멍을 찾지 못해 시간을 낭비하다 보면 오줌을 누다가 방귀를 뀌는 것보다 훨씬 당혹스러운 상황을 마주 할 수도 있다. 밝은 데서 살펴보니 쫄쫄이는 엄마 것이었다.
과거의 경험으로 현재를 버티는 남자에게 레깅스는 바지 안에 입는 쫄쫄이 과다. 속옷인지 겉옷인지 정체가 불분명한 이런 패션을 길에서 만나게 되면 애써 시선을 돌리곤 했는데 레깅스를 입고 산을 오른다는 것은 의외였다. 레깅스를 입어 본 적 없는 남자는 딸아이에게 자문을 구했다. 레깅스의 장점은 쫄쫄이와 같았다.
'마치 안 입은 것처럼 얇고 편하지만 따뜻하다.’
산에 가면 당연히 등산복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입어야 입은 것 같은 고어텍스는 바람과 비를 막아주고 땀을 외부로 발산하는 기능성 섬유라 비싸다. 한번 샀으면 본전을 뽑아야 되니 오래 입어야 한다. 들과 산을 벗어나 도심의 쇼핑센터, 심지어 에펠탑이나 콜로세움 앞에서도 이런 아웃도어 의류와 심심찮게 접하게 되는 이유다. 하지만 비가 온다는 예보에도 불구하고 산을 찾을 사람은 별로 없으며 반나절도 걸리지 않는 낮은 산에 가면서 히말라야 등반대의 복장이 필요하지는 않다.
만나지 말라고 하니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고 단지 내 놀이터에만 나가도 마음이 홀가분하다. 뿌연 미세먼지에 싸인 산은 편하고 따뜻한 레깅스와 원색의 고어텍스 재킷을 입은 등산객들로 버글거렸지만 사람들이 반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