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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토 Feb 15. 2024

중년을 위한 나라는 없다

청년에서 노년으로 향하는 중간항로

 작년에 건강검진을 받았다. 대사증후군이 의심되니 재검받고 건강관리 하라는 친절한 문자가 왔다. 올 것이 왔구나! 흰머리는 염색하면 되고, 뱃살은 운동해서 빼고, 처진 볼살은 필러 넣으면 되지만 몸에선 서서히 노화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오십 대에 접어들면서 중년인지 장년인지, 초기 노년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친절하게도 대한민국 정부는 생애주기별로 중년은 40에서 49세, 장년은 50에서 64세, 65세 이상은 노년으로 구분해 주지만 청년, 중년, 장년, 노년에 대한 정의는 수명 연장, 노령연금 지급 시기, 시대나 문화적 상황에 따라 고무줄처럼 늘어나고 있었다.


80년대 말 90년대 초, 통기타 음악을 대표하는 가수 김광석은 그의 노래 <서른 즈음에> 서 “머물러 있을 줄 알았던 청춘은 떠나갔고 그 계절은 다시 오지 않는다” 고 중년의 소회를 노래했다. 요즘 남녀 초혼 나이가 삼십 대 초반인걸 감안하면 30대가 펄쩍 뛰겠지만 그 당시엔 30대 중반이면 중년이었다. 상처받을 그들을 위해 청중년이라는 새로운 구분을 만들어야 할지 모른다.


 “논어”를 인용해 사십을 불혹, 오십을 지천명이라 부르지만 잘못 알고 있었다. 글의 서두에 나오는 주어인 “나는”에 주목하면 공자 자신이 불혹, 지천명, 이순이었다는 말이다. 어떤 이는 포괄적 해석을 받아들여 “우리“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성인으로 추앙받는 공자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40에 이르면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십 년이 지나면 천명을 알게 되며, 60이 되면 다른 사람 말도 순하게 듣게 된다고 말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나 당신 주위의 지인들이 40이 되면 유혹에 흔들리지 않더냐고? 50에는 하늘이 준 소명을 알게 되더냐고?.

공자는 자신을 모범으로 삼아 연륜이 깊어질수록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에 변화를 가지라는  조언이 아니었을까?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 所欲不踰矩."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15세에 공부를 하겠다는 뜻을 세웠고, 삼십 세에 이르러 일가견을 지니게 되었으며, 40세에 되어서는 유혹에 흔들리지 않게 되었고, 50세에는 천명을 깨닫게 되었고, 60이 되어서 다른 사람의 말을 편히 듣게 되었다."

— 《논어》 위정 편(爲政編)


 “노안이 오면 노인이다”. 신체적 정신적 변화가 찾아오면 노년의 신호로 받아들이라는 충고도 들었다. 가까운 것이 흐릿하게 보이는 노안은 보통 40대부터 온다. 40부터 노인이라는 다소 충격적인 정의를 받아들이면 장년이라는 호칭에 한 다리 걸치고 있는 오십 대는 의기소침 해진다.

기대수명이 늘고, 영양상태도 좋아지고, 각종 감염이나 전염병에 걸려도 치유될 확률이 높지만 육체의 노화는 몇 백 년 만에 달라지지 않는다. 19세기에는 남자 16세, 여자 17세가 평균 초혼연령이었다고 한다. 요즘 나이로 중고등학생 때 혼인과 출산을 했다는 말이다. 특별히 하자가 없다면 10대 말에 아버지가 되었으며, 30대에는 손자를 봤을 것이며, 장수하는 집안 이면 50대에 증손자를 안았다는 말이 된다. 백여 년 전 태어났으면 증손자 업고 다녔을 텐데 장년이라고 우길수 있을까? 육체는 노년을 맞고 있었다.  


요즘엔 노인들도 노인이 아니라 액티브 시니어라 불리길 원한다.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젊은 사람들과 유연하게 어울리며, 외모와 소비재에 젊은이 못지않게 돈을 쓰는 노인을 지칭한다.  


 서울숲에 산책 나갔다가 딸과 리뷰가 수백 개 꼬리를 물고 있는 파스타 집에 들어간 적이 있다. 간판도 없고 도로 쪽으로 나 있는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문 옆에는 큰 거울이 걸려 있는데 딸아이가 “아빠 거기 아니야” 하면서 밀고 들어가니 2층 계단으로 연결된 입구가 나왔다. "자기들이 무슨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야? 백설공주야?” 구시렁 대며 들어가니 손님은 모두 이십 대 여자들. 종업원이나 손님들이 눈치 주지 않았지만 황급히 파스타 한 그릇을 흡입하고 나왔다.

 솥밥을 먹으러 간 적도 있었다. 아내가 알려준 상호는 분명 순우리말이었는데 지도를 보고 찾아가니 읽지도 못하는 일본어 입간판만 조그맣게 걸려 있었다. 혹시나 하고 들어가니 약속한 밥집이 맞았다. 핫플인 성수동엔 구글 번역기를 돌려야 간판을 읽을 수 있는 가게들이 즐비한데 한글학자들이 오면 뒷목 잡고 쓰러질지 모른다. 난해한 간판과 오리진을 가늠하기 힘든 다국적 음식은 나 같은 사람에게 ‘웬만하면 오지 마세요’라는 공손한 경고였다. 젊음과 노년 사이엔 건너기 힘든 긴 다리가 존재한다.


오십이 뭐라 불리던 2018년 9월 3일 자 정신의학 신문엔 중장년을 청년과 노년사이에서 애매하게 포지션을 취하고 있는 박쥐(?)로 묘사하며 이 세대의 특징을 아래와 같이 정의한다.


청춘을 바쳐 일했지만 일찍 은퇴해야 하는 세대.

나는 부모님을 모셨지만 내 자식은 나를 부양하지 않는 세대.

돈 드는 데는 많지만 돈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세대.

건강, 가족 내 무관심, 퇴직, 여가시간 보내기, 경제 및 노후등 걱정이 많은 세대.  

지금껏 뭘 위해 살았지? 나는 누구고 여기는 어딘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고민하며 철학을 하는 세대.


  사춘기 때 미뤄둔 질문을 다시 꺼내거나, 거울 속 얼굴이 점점 낯설어진다면 하산할 때가 된 것이다. 아직 득도를 못 했어도 아쉬워하지 말자.

젊음은 희망으로 살아야 하고, 늙음은 감사로 버티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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