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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은둔자 Jul 28. 2023

경험자원, 배우고 일하고 느낀 것


어릴 적 꿈은 화가였다. 그림 그리는 것이 제일 좋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기억의 한 자락은 초등학교 5, 6학년 때 아빠와 함께 일주일에 한 번씩 서울에 가서 그림을 그리던 일이다.

아빠는 검도부 OB 모임에서 운동하는 시간을 가지고 나는 그 시간 동안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원 없이 그렸다. 선생님이 아빠 후배의 부인이라 그 시간은 얼마든지 허용되었다. 선생님께 배우는 시간도 있고 나 혼자 몰입하는 시간도 있고 그 사이에 간식도 먹고 하루 중 꽤 오랜 시간을 그렇게 보냈다. 아빠가 좀 늦어지는 때에는 아빠는 늘 지루하지 않았냐고 미안해하며 물었는데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때 그 시간은 아빠와 나 각자의 오티움으로 채워진 시간이었다.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 심리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보다 실용적인 학문인 사회복지를 택했다. 의료사회복지학을 수강하고 보다 전문성을 가진 길을 가고자 방향을 설정했고, 병원 실습과 자원봉사, 연수 등의 경험을 늘려나갔다. 물론 급여에 대한 부분도 생각했다. 사회복지사끼리 결혼하면 기초생활수급자 가정이 된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박봉이 많았다. 그런 부분에서 병원 의료사회사업은 예외적이었다. 다만 티오가 거의 없어 취직이 어렵다는 것이 문제일 뿐..


졸업 전 운 좋게 임시직을 거쳐 한 달여의 공백 후 나는 재단 내 다른 병원에 정규직으로 입사했다. 우리 팀은 나 포함 두 명이었고, 단단하게 셋업 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해를 거듭하며 나의 전문 임상과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전문 자격증도 계속 취득해 가며 경험을 쌓아갔다. 임상 업무 외에 행정 업무도 무척이나 많았다. 하지만 2명이서 팀을 꾸리다 보니 거의 모든 일을 다 경험해 보게 되었고 그때의 다양한 경험은 나를 더 유연하게 만들었다. 실습생과 연수생들을 트레이닝시켰던 과정들도 기억에 남는다. 나는 가이드를 확실히 주는 편이고 피드백 역시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런 경험과 자신감이 내가 경단녀의 과정을 거쳐 다시 일을 찾을 때, 누군가를 훈련시키는 일이 나에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도 했다.


몇 년 후 이례적으로 3명의 직원을 증원하는 성과를 내며 우리 팀은 커졌고, 전보다 훨씬 안정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성장 욕구는 다시 꿈틀거렸다. 어차피 비공식적으로 석사 출신이 대부분인 곳이었기에 예상해 온 과정이지만, 학업과 일을 병행할 수 있는 과정이 있음에도 나는 다시 공부를 파고 싶었다.

주변의 만류에 한 학기를 병행하며 시도하였고, 많은 돈과 시간을 낭비했다. 그리고 직장에서는 쪼개 쓰는 휴가에 마음이 편치 않고, 연구실에서는 모두 풀타임 학생으로 올인하고 있으니 참으로 여기저기 눈치 보게 되는 상황이 너무 싫었다.


일을 놓고 다시 전업 학생이 되었을 때의 기분을 잊지 못한다. 주변에선 모두 교직원 신분의 직장을 뛰쳐나오는 것에 대해 아까워했지만 나는 후회 없었고 앞으로가 또 기대되었다. 연구실 생활은 또 나름의 끈끈함이 생기고 재미도 있었지만 석사 신분의 한계를 느끼기도 했다. 티칭을 염두에 두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는 1:다수의 강의보다 1:1 관계가 더 편안하고 수월함을 실감했다. 연구원 생활도 잘 맞기는 했지만 대체로 혼자 하는 게 더 편하긴 했다. 대학원 생활을 굳이 비유하자면 자영업자의 삶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ㅎㅎ 공동체의 삶이긴 한데 한밤중에도 이메일을 확인하고 수정과 반복을 거쳐야 했다. 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는 직장인과는 달랐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기도 하다. 많이 즐기고, 자유롭게 살았다. 논문 학기를 남기고 한 달간 유럽 여행을 떠나기도 했고 나는 많이 변했다. 


사진: Unsplash의Med Badr  Chemmaoui



결혼 후 해외 여러 나라에 거주하며 막연히 원했던 미국에서의 박사과정도 하지 못했고, 또 돈을 벌어보지도 못했다. 우리 부부의 삶의 방향은 남편의 학업과 일로 움직였다. 내가 온전히 결정할 수 없는 것들에 화가 나기도 슬프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참으로 남편을 지지하고 응원했다. (나 착한 사람 ㅎㅎ)


분명히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라 생각은 참 많이 했지만 가장 큰 걸림돌은 언어였다. 더구나 상담을 기본 베이스로 하는 나의 일에서 언어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가뜩이나 완벽주의적인 성향 때문에 생각과 계획만 많고 실행이 더딘데 어느 정도 선에서 그냥 내가 막 시작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동남아 거주 시 INGO에서 면접도 보고 작은 시도를 해보기도 했다. 특히 프랑스 INGO에서 자원봉사를 했던 경험은 나의 거창한 도전이자 자산이 되었다. 인터내셔널 직원들은 3층 사무실을 썼다. 주로 유럽 친구들이 대부분이었고, 유일한 아시안은 말레이시아 친구와 나 둘 뿐이었다. 거기에 내 책상도 하나 있었고 1인 1선풍기 시스템이었다:) 팀별로 따로 뭉쳐 앉지도 않고 큰 소리로 대화도 하고 웃고 떠들며 너무나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처음에 적응 안 됨 ㅋㅋ) 메신저로 반갑게 말을 걸어오는 친구들도 있었고, 점심시간도 충분히 썼다. 툭툭이 4자리를 꽉 채워 함께 주변 식당으로 나가기도 하고, 현지 직원 오토바이 뒤에 타고 한식을 먹으러도 갔었다. 칵테일파티에 남편을 대동하기도 하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내가 너무 대견하다 ㅎㅎ 내성적인 나란 아이는 언제나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나를 시험하고 경험한다.


임신과 출산은 나를 또 다른 세계로 인도했다. 세상에 내맘대로 되는 게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나는 계속 더더더 잘하고 싶었지만, 끝이 없는 것 같았다. 아이가 두 돌이 되면서 어린이집에 가게 되었고, 우연히 알게 된 동네 그림책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그게 몇 달이 되면서 나는 이제 또 온라인 세계를 알게 되었다. 아이 수면 코칭을 시작으로 블로그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서 원서 모임, 블로그 강의, 독서모임, 글쓰기, 디지털드로잉, 스마트스토어 등등 무수한 온라인 강의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내가 이런 강의들을 신청하면서 알게 된 나의 또 다른 특성은, 나는 뭐든지 데드라인까지 붙들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돈이 안 드는 무료 강의를 신청할 때도 나는 무수히 고민하고 마지막 날에야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래서 조기 마감으로 놓친 적도 많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그랬다. 중요한 성과물을 제출할 때에도 벼락치기야 기본이긴 하지만, 일찍 시작했다 한들 나는 좀 더 완성도를 높이겠다는 의지하에 (설사 절대 다시 들춰보지 않더라도) 데드라인에 맞춰 제출하는 사람이었다.


사진: Unsplash의Raphael Nogueira



온라인 활동에 눈을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경단녀 생활을 끊고 재취업에 성공하기도 했다. 전공을 살려 지역 공공기관 기간제로 근무를 시작했고, 과거에 내가 하던 업무에 비하면 여러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어쩌면 나는 그 속에서도 무수한 장점을 뽑아냈다. 오랜 공백을 깨기에 너무 무리가 되지 않는 업무의 난이도나 강도, 업무 권한이 많지 않은 대신 책임도 덜해서 워킹맘 생활이 가능한지 시험해 보기에 딱 적합한 정도라 여겨졌다. 특히나 클라이언트를 직접 만나는 일은 나에게 잘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은 편안함을 주었다. 하지만 이 사업의 한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오래 할 자리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마침 연장 예정이었던 사업이 코로나가 심해지면서 잠정 중단되었고, 나는 그렇게 기간 종료 후 잠시 쉼의 시간을 가졌다.


직장생활을 하다 쉬는 것은 정말 꿀맛 같았다. 그대로 계속 출근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ㅋㅋ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면접을 보게 되었는데 오버퀄리파이드로 어렵다는 이야길 들었고, 첫 기관에 있던 어느 직원의 추천으로 또 다른 기관에서 연락을 받게 되었다. 면접 중 이런 사람이 왜 여기 있냐며 (우리 동네의 인적 자원이 많이 부족하다 ㅋㅋ) 나는 다시 새로운 직장을 가졌다. 이번엔 클라이언트에게 단순 물자 지원이나 말벗 등 정기 서비스를 하는 이들을 관리하는 업무였는데 예상은 했지만 이건 꼭 내가 아니어도 다른 누군가가 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기관장은 기관의 메인 사업보다 이 사업이 더 커질 거라고 나를 독려했지만 나에겐 정말 매력적이지 않은 일이었다. 집에서 가까운 게 최대의 장점이었는데 그곳에서는 참으로 의미를 찾기 어려웠고 피곤했다. 매달 꼬박꼬박 월급의 맛을 알아버렸지만 결국 굿바이를 고했다.


아이를 너무 일찍 혹은 너무 늦게 등하원 하지 않아도 되길 바랐다. 그리고 갑자기 응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내가 바로 나설 수 있는 것이 중요했다. 갑자기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양가 부모님도 가까이 안 계셨기 때문이다. 결국 9-6의 직장 생활, 출퇴근 시간과 지독한 교통정체까지 감안하면 동네를 크게 벗어날 수도 없으니 회사 생활은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나는 내 자격증을 활용해서 할 수 있는 다른 길을 찾았다. 초기 자본이 많이 필요하지 않아 일단 시작해 보기로 했고 이 결정에는 역시 나와 다른 남편의 결단력이 도움이 되었다. 현재 나는 자영업자의 삶을 시험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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