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그만 좀
6살 큰아들은 미로 찾기에 빠졌다. 미로를 푸는 것의 이병 시절을 지나, 아빠 이 미로 풀어줘의 일병 시절도 지나, 아빠 내가 그린 미로 풀어봐의 상병 시절까지 왔다. 소싯적에 미로에 솔찬히 빠져본 경험자의 입장에서 이 미로 지옥은 갈림길이 적어도 20개는 나오는, 본인도 기억력이 뛰어나지 않은 이상 자기도 헷갈려 못 푸는 미로를 제작할 때쯤 때야 전역할 수 있다.
그때쯤이면 오바로크로 그려내는 전역모의 개구리 모양처럼 미로를 자유자재로 그리는 실력자가 된다. 미로의 모양으로 개구리의 물갈퀴와 툭 튀어나온 눈의 표현이 가능하다. 불행한 건지 아직 큰아들이 이 지경까지 오려면 상당한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내가 시달려야 할 시간도 아직 한참 남았다는 뜻이다.
말은 이렇게 해도 육아로써 이러한 경험은 사실 뿌듯하다. 내가 어렸을 때 놀았던 놀이문화를 내 아들이 그대로 공유한다는 점이 굉장히 '찐'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이 있을 때마다, 나는 내가 어렸을 때 뭐하고 놀았는지를 리스트화 시켜 머릿속에 기억해뒀다. 차이가 있다면 지금이 좀 더 현대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슈퍼 컴보이가 닌텐도 스위치가 되었고, 장판 조각에 볼펜으로 과녁을 그려 쏘던 활쏘기 장난감은 화살통까지 붙어있는 어린이 양궁세트가 되었다. 소소하게 따지자면 우뢰매는 미니 특공대로, 킹 라이온은 헬로카봇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보트 5개가 합쳐져 하나의 거대 로봇이 되는 장난감은 예나 지금이나 더럽게 비싸다는 것은 시대를 관통하는 공통점이다.
허나 나는 그 킹 라이온을 가지지 못했고, 아들놈은 헬로카봇 5개가 합쳐지는 펜타스톰을 가지고 있다는 게 나를 서글프게 만들긴 했다. 내 청춘이여. 뒤늦게 볼트론 (킹 라이온의 미국판 명)이 레고로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구입하려 했으나 이내 포기했다. 레고는 합체가 되지 않는다. 이건 합체가 되어야 의미가 있는 물건이다. 물론 비싸기도 했다.
다시 미로로 돌아오자면, 나는 이 놀이를 금방 끝내는 방법을 안다. 아들이 그려준 미로를 못 푸는 척 연기하며 막 다른 골목길에서 한껏 심란한 연기를 하면 된다. 아들은 아빠도 못 푸는 세상 어려운 창작물을 만들어냈다는 성취감을, 나는 단시간에 아들과의 놀이를 끝내고 자유시간을 얻을 수 있다는 행복감을 누릴 수 있다.
허나.
쓸데없는 남자의 자존심이 문제다. 6살 아들이라도 쉽게 져줄 수 없다. 남자는 원래 지면서 성장하는 것이며, 이기는 성취감은 맛볼수록 즐거운 것이다. 비록 그게 30살 차이나 난 네놈이라도 말이다. 쉽게 풀 수 있지만 고뇌하는 척 연기하기도 슬슬 지겨워진 나는 아예 궁극의 필살기를 사용하기로 했다. 구글에서 미로를 찾아 인쇄했다.
비슷한 상황을 겪는 독자분이 계시다면 검색어로는 'crazy maze'를 추천한다. 나의 자유시간을 얻기 위해 5-6장을 한꺼번에 인쇄해 아들에게 던져줄 요량이었다. 적당한 선을 지키는 아빠로서의 미덕 역시 잃지 않았다. 너무 어려운 것은 제외하고 적당히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은 미로를 세심하게 골랐다.
이 정도의 판단력은 어른 세계에서는 패시브로 장착되어 있다. 너무 잘하면 계속 일감이 오고, 너무 못하면 무시당하는 약육강육의 세계, 이래나 저래나 고깃덩이로 전락해버리는 이 혼돈의 세계에서 '중간만 해라'의 진리는 직장인의 기본 덕목 아니겠는가.
허나
결론은 이것이 아니었다. 미로를 보자마자
‘아빠 어려워 나 안 해. 딴 거 할래 나랑 놀아줘'
5초 만에 나온 아들의 답변을 듣고 현실 자각 타임이 등장했다. 아 맞다. 그랬지. 우리 아들은 포기가 빠른 편이었다. 아슬아슬 아들과의 줄타기에 실패하고 그냥 아들놈과 재밌게 놀아줘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나의 자유시간은 포기할 수 있다. 언젠가 그 시간은 오겠지 뭐. 이렇게 쉽게 포기하고 보니. 어라? 포기가 빠른 것도 유전자의 힘이었나 싶다. 역시 내 아들이 맞구나. 그래 맞다. 내가 좀 힘들어도 어떠리. 이 아름다운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 것을 안다. 이 시간이 미로처럼 빠져나오기 힘든 길이라도 고뇌하지 않을게. 그렇게 한 뼘 더 너의 아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