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닌 것 같으면서도 확실하게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명확하게 느끼는 점은 부모와 정말 놀랄 듯이 닮아있다는 점이다. 나의 성격, 나의 행동, 나의 생김새, 나의 기질 이런 것들이 고스란히 옮겨져 있는 또 다른 생명체를 마주하고 있자면 자연의 섭리에 경외감을 갖게 만든다. 나와 똑같지만 도무지 부모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면 신이 되어 피조물을 창조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겠다. 따라서 신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겠구나 싶다. 이 세상을 창조한 신 역시도 내 맘대로 되지 않아 어디 뒷방에 앉아 새우깡에 깡소주 한잔 들이키고 있지 않을까.
나는 아들 둘의 아빠이다. 나도 아들 둘 있는 집의 막내로 자라왔고, 내가 똑같이 남자아이 둘을 키우는 입장이 되어보니 쉽지 않은 난이도의 게임에 등장한 캐릭터처럼 우왕좌왕하는 일이 많았다. 애당초 거창한 계획 같은 것은 없었다. 든든한 버팀목이나 존경받는 아빠와 같은 수식어들은 나를 잘 표현해줄 수 있는 단어들이 아니었다.
목적도 계획도 딱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다. 내가 겪은 것 중 좋았던 것들은 더 해주고, 싫었던 것들은 하지 않는 것이 그 계획이었고, 아이들과 같이 잘 살아가는 동반자가 되어가는 것이 육아 책임자로서의 목적이었다. 나 역시도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어러 가지의 육아 영상이나 책들을 참고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 방식들이 어느 면에서는 고루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아이를 키우는 환경이 너무나 바뀌어 있다는 점이었다. 뒷골목에 공하나 던져놓으면 온 동네 아이들이 뛰어나와 동네를 쓸고 다녔던 예전과는 달리, 공놀이를 하려면 돈을 주고 축구클럽, 농구클럽에 가입해야 하는 시기가 된 것이다. 저학년 때부터 아이를 맞이해 주는 것은 엄마가 차려주는 간식이 아니라 아이를 실어 나르는 노란빛 학원차가 더 많아진 세상이 되었다.
아이들과 놀아주고, 여행을 다니고, 같이 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화목한 가정이 된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출퇴근 시간이 길어지고 맞벌이가 많아진 현실에 부모 역시도 나머지 체력과 감정을 아이에게 온전히 투영하더라도 부족함을 느끼게 되는 시대가 되었다. 아이들의 보육이 사회와 공유되기 시작하고 어느 정도 시스템에 탑승해야 떠밀려가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내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감정의 공유라고 생각했다.
이 글은 목적은 잘잘못을 따지거나 누군가에게 조언해주기 위해 쓰이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방식이 옳은지 틀린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내가 자라왔을 때의 기억을 토대로 남자아이의 입장에서 두 아이의 입장을 생각하려고 했다. 그 작은 감정의 범위에 공감하는 독자가 있다면 나도 위로받고 싶고,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싶다. 육아는 어떠한 상황에도 전부 어렵지만 당연하게도 자기가 처한 상황이 제일 어렵다.
특히 아들 둘을 키우는 게 너무나도 어렵고 힘들다.
지금도 우리 아이들은 집안 물건을 다 끄집어내고 정신없이 괴성을 지르며 떠들고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온순하게 자랐다고 생각했는데 '쟤네들은 왜 저럴까'라는 자문자답을 수십 번씩 하게 된다. 누가 저 아이들과 평소에도 말이 없고 내성적인 나를 부모와 자식 사이라고 생각할까 싶다. 하지만 아이들의 그런 모습까지 가장 잘 이해하는 것도 결국 엄마와 아빠이다. 그렇게 자문자답을 하며 글을 시작해본다.
'아니요. 제 아들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