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꼭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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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오

정신과에 갔다 왔다. 한 달 간격으로 다녀온다. 먼 길이다. 수십 번을 오갔는데 갈 때마다 길이 헷갈린다. 갈 때마다 정신줄을 놓고 다녀서 그런가 보다. 멍하게 기차 타고, 멍하게 지하철 타고, 멍하게 환승하고, 멍하게 진료받고, 멍하게 약 받아온다. 밖에 나가면 그냥 멍해진다. 전파 방해를 받는 라디오처럼 수신이 자꾸 끊긴다. 전반적으로 해상도가 떨어진다.


언젠가부터 병원에 가는 날이 다가오면 압박감을 느꼈다. 의사 앞에서 지난 한 달간 무언가 발전된 모습을 보여야 할 것 같았다. 그걸 친구한테 말했더니 그가 이렇게 말했다.

“발전 안됐으면 안된채로 ㄱ / 눈치ㄴㄴ”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졌다. 덕분에 더 멍하게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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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님이 이제 내가 눈에 익었는지 오늘은 내가 약국에 들어서자 웃으며 인사하셨다. 처방전을 건네받으며 “금방 해드릴게요”라고 말했다. 약을 받고 나갈 때도 웃으며 눈을 마주쳤다. 예전에 처음 갈 때만 해도 무미건조한 표정에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었는데. 뭔가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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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 친구들과 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다. ‘갓생 살자.’ 정말 막연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고, 그래, 해상도가 떨어지는 말이었다. 멍하게 터덜터덜 걸으며 허공을 보고 그런 말을 내뱉었었다. 그런데 오늘 병원에 갔다 오면서 오랜만에 그 말을 떠올렸다. 바깥에서 내 몸은 종잇장처럼 나풀거렸고, 온종일 정신이 멍해 좀비처럼 비척거렸다. 갓생을 살고 싶었다. 아니, 당장에 죽을 게 아니라면 갓생을 살아야만 했다. 불 끈 방에서 유튜브를 보다 잠드는 건 갓생이 아니었고, 아침에 알람이 울린 지 한 시간이 지나야 일어나는 것도 갓생이 아니었고, 낮 동안 휴대폰만 붙잡고 있는 것도 역시 갓생이 아니었다. 나는 지난 한 달간 매일 글을 쓴다는 미명 하에 도대체 뭘 했던 것인가. 무언갈 해야만 한다. 아, 두렵다! 나는 이제 막 먹구름 속에서 벗어난 참이다. 수개월을 내 손바닥만 보다가 이제야 겨우 길바닥을 보고 있다. 존재하는지조차 까먹고 있었던 바깥세상을 다시금 조우하고 있다. 갓난아기가 된 것만 같다. 내 몸과 마음은 연하디연해서 지나가는 바람 한 점에도 베일 것 같다. 정말이지 쓸데없이 곱다. 몸만 크고 모든 게 어려서 징그러울 정도다. 어릴 때 친구 집에서 봤던 천장의 야광별을 아직도 떠올린다. 발전이 없다. 예전처럼 갓생은 멀기만 하다. 아니, 그때보다도 더 멀어진 느낌이다. 나는 지난 수개월간 후퇴를 거듭했으니까…. 이만하면 되었다. 이런 꼴사나운 자기 비하는 그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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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병원에 갈 때 가방에 태블릿을 챙겨 갔다. 오고 가는 기차 안에서 이북을 읽었다. 어떤 여자의 수필집이었는데 읽는 내내 질투가 났다. 그녀는 부모님과 사이가 막역했고 사랑도 많이 해봤고 자기 자신도 사랑했다. 나는 깨달았다. 방금 말한 세 가지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모든 걸 공유할 수 있는 부모님이 있다는 것, 사랑할 사람이 있다는 것, 그 이전에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사랑은 꼭 필요합니다.’라는 말을 나는 자꾸만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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