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지 모르겠지만, 수줍음이 많은 사람은 때때로 변해버린 자신의 일면과도 낯을 가린다. 가령 오랜만에 헤어스타일을 바꿨다면 며칠 간은 거울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다. 거울은 지나는 김에 휙 한 번 대충 본다. 그러다 익숙하지 않은 나의 실루엣을 알아채고는, 어디에도 말하기 애매한 ‘나와 서먹하고 어색해져 버린 사이’가 된다. 나는 겉으로는 아닌 척을 해왔지만, 가까스로 수줍은 낯가림 쟁이임을 들키지 않은 채 어렵사리 살아왔다.
바깥에서는 괜찮다. 하지만 집에서는 나도 묵직한 허물을 벗어 던지고 무르고 말랑한 알맹이인 채로 뒹굴거리고 싶단 말이지. 이런 내게 그간 사소하지만, 무엇보다 일상적으로 가득 들어찬 불편함이 있는데, 그것은 집 이곳저곳, 방구석 귀퉁이마저 속속들이 들어찬 고밀도의 빛, 형광등이다.
아, 형광등. 내겐 언제나 천부당만부당했던 것. 집의 가장 높은 곳에 매달린 채 자신만만함이 도를 넘는, 과하게 눈부신 자. 빼기와 나누기를 닮은 자비라곤 부릴 생각이 없는, 오직 더하기와 곱하기로 빛을 부풀려 ‘여길 보라!’고 꾸짖는 과잉의 밝음 따위. 형광등은 참 꾸준히 눈치가 없다. 모든 가정집을 안경점처럼 만들고는 모든 걸 보게 한다. 빛이 시끄러울 수도 있나? 형광등 아래 오래 머물면 눈을 감고 싶은 게 아니라 귀를 막고 싶어지니 말이다. 심지어 요즘엔 led 등으로 진화해 영생마저 꿈꾸더라.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고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던데, 어디든 닿으려 하는 형광등은 나쁘다. 그들이 착하게 남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우리 집 형광등은 모두 천국에 보내버렸다. RIP 형광등.
집 인테리어를 하며 형광등을 보내겠다며, 완전히 없애겠다 호언장담했다. 그랬더니 그럼 나중에 집을 팔 때 골치 아플 거라는, 전기 설비를 다 해줘야 할 거라는 부동산 중개인과 인테리어 담당자의 엄포가 날아왔다. 뼈를 심하게 때리는, 매우 맞는 말이었다. 맞는 말 해주는 사람은 우리 편, 피아식별이 빠르고 대체로 바로 수긍하는 편이라 우리 집 천장에도 형광등을 설치하기로 했다. 걔네는 그 후로 지금까지 줄곧 농구공을 쥔 강백호의 왼손처럼 늘 ‘거들 뿐’이다. 있긴 하지만 스위치는 언제나 오프 상태니까.
나는 작은 세상의 빛의 지배자가 되었다. 마음을 먹으니 해도 되고 달도 되고 별도 될 수 있었다. 거실 구석에는 긴 스탠드형 조명, 주방 입구의 아일랜드 테이블에는 작은 조명을 두었다. (이 조명은 앱으로 조절할 수 있는데 얘네 둘의 이름은 큰 애는 장도연, 작은 애는 박나래다) 침대 머리맡에 독서등, 거실에는 책꽂이와 소파에 낮게 깔리는 핀 조명 등 온갖 간접 조명을 설치했다. 간접 조명이라니 이름마저 내 스타일. 책에 닿아 전해지고, 벽에 내린 뒤 바닥에 뿌려지는 조명들. 우린 서로를 바로 대하지 않고 매개가 된 사물을 통해 연결되어, 더욱 온화하게 감쌀 수 있는 사이다.
서울이 그렇다면, 지금 더 오래 머무는 제주집은 어떤 상태일까. 연세로 계약하고 들어온 집에 어느덧 열 달 째 머물고 있다. 완벽하진 않지만, 형광등의 기세를 몰아내기 위해, 틈틈이 크고 작은 조명들을 중고거래 앱으로 구해다 놓았다. 나를 잘 아는 지인은 이사 선물도 두 개의 간접 조명을 보내왔다. 이 작은 집에 간접 조명이 8개나 있다니. (글을 쓰는 책상에만 3개…)
침대방에서 멀리 있는 바다가 길고 넓게 보이는데, 자기 위해 온 집의 불을 다 꺼도 은은한 빛이 창문으로 새어 들어온다. 그 빛은 어화( 漁火). 고기잡이하는 배에 켜는 등불이나 횃불이다. 물론 지금은 형광등의 형제 격인 전구로 불을 밝히겠지만, 먼 곳에서 우리 집에 닿을 때는 등불처럼 아득한 질감이다. 침대에 같이 누운 남편의 옆 테, 옆구리나 발아래 자리한 반려견 무늬의 둥근 등. 한밤중 내가 가만가만 들여다봐야 하는 실루엣은 모두 보인다. 먼바다에 떠 있는 배 위에서는 한낮의 태양보다 밝게 비추어 험한 바닷길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기를. 인간의 풍요로움이 되어주는 바다 생물의 삶의 마무리가 부디 그에 맞게 씩씩하고 웅장하기를.
이렇게나 애틋하고도 절실한 간접 조명이 제주집 침실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