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라이스와 흰 한강 작가

구조견 임시보호 2일 차

by 홍지이

2023년 1월 1일, 라이스 임시보호 2일 차가 되었다. 2022년의 마지막 날에 찾아와 2023년 새해를 함께 맞이한 라이스! 한 해의 마무리와 시작을 함께 한 이 특별한 하숙생은 숨소리 하나 밖으로 새어나갈까 싶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첫 밤을 보냈다. 라이스가 머무는 곳에 웹캠을 설치해서 자기 전까지 살펴봤다. 하지만 켄넬 안에 들어가 한 발국도 나오지 않아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여느 때와 같이 일어났을 아침, 갑자기 낯선 사람 손에 이끌려 영문도 모른 채 몇 번 타본 적 없는 자동차를 타고 멀리 달려왔다. 도착한 곳 역시 처음 와 보는 낯선 공간. 단체의 보호소보다는 집이 따뜻하고 아늑하다지만, 익숙한 봉사자 분들과 양 옆에 자고 있는 친구들이 없는 곳이라면 라이스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제와 오늘은 작은 라이스가 태어나 보낸 하루 중 한꺼번에 가장 많은 변화가 생긴 날일 것 같다. 피곤해서 곯아떨어졌을지, 한껏 경계하느라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을지. 두 가지 상황 다 딱하고 안쓰럽긴 하지만 그나마 나은 건 조금이라도 잠을 잤어야 했을 텐데.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다 잠들었을지 마음이 쓰였다.


라이스의 보금자리는 우리 집에서 가장 조용한 서재방에 마련했다. 서재방에서 가장 아늑한 모서리에 있던 독서용 1인 소파와 풋스툴을 거실로 옮겼다. 그 자리엔 라이스의 켄넬과 방석, 물그릇을 갖다 놓았고, 러그 대신 강아지용 매트로 바꿔 깔았다. 반려견 무늬와는 천천히 인사하여 서로의 성향을 파악하며 합사 하기로 했다. 서재방 문에 안전 난간을 설치했다. 켄넬 문은 진작에 활짝 열어놓았지만, 라이스는 그 안에 도넛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고 누운 채 까만 눈동자만 굴리고 있었다. 혹시 배가 고프면 켄넬에서 나오지 않을까? 밥과 물그릇을 켄넬에서 조금 걸어 나와야 먹을 수 있는 자리에 두었지만 코만 킁킁거릴 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왕자님은 식사 중

우리 집에 강아지 왕족의 수맥이 흐르나 보다. 반려견 무늬도 코 앞까지 갖다 드려도 먹을까 말까 한 쫄보 공주님인데 라이스 얘도 겁쟁이 왕자님인가 보다. 켄넬 안에 밥그릇을 넣어줬다. 그래도 안 먹는다. 아, 미천한 이 몸은 자리를 비워드려야 한다는 거구나. 알았다. 나와서 방문 옆 사각지대에 숨어 있었다. 얼마 안 있어 들린다. 언제 들어도 듣기 좋은 냠냠쨥쨥 강아지 밥 먹는 먹는 소리가. 소리가 금방 멎었다. 웹캠으로 살펴보니 밥그릇이 깨끗하게 비었다. 겁이 많은 왕자님 치고 밥은 잘 먹으니 다행이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움직이지도 않으려 하는 애(입양 초기의 무늬) 걱정에 발만 동동 구르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무늬보다 나은 첫출발이면 나쁘지 않다. 라이스!


살짝 들어가 밥그릇을 들고 나왔다. 금방 또 사부작 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가보니 넓게 펼쳐놓은 배변패드 하나에 노란 쉬를 해 놨고, 쉬를 밟은 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발자국을 내놨다. 그래놓고는 아무것도 안 한 척, 움직이지 않은 척 켄넬에 들어가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고 착하고 기특해! 작은 목소리로 칭찬해주고 패드를 새 걸로 간 뒤 대충 바닥을 훔쳐서 발자국을 없앤 후 나왔다. 얼마 후 또 사부작 거리는 소리! 이번엔 다른 패드에 갈색 응아를 해 놨다. 아이고 예뻐라! 낯선 곳에서 배변을 하는 용기라니. 내 기준에서는 너무 용감한 아이였다. 기특한 라이스네~라고 칭찬해주며 깨끗하게 치워줬다.

어쩌다보니 켄넬 탈출에 성공한 라이스!

저녁을 먹을 시간쯤이었나. 서재방에서 우당탕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빠른 걸음으로 방 앞에 가 보니 켄넬 문이 내가 열어놓은 거보다 조금 닫혀 있고 켄넬이 비어 있었다! 라이스는 어디에? 방의 다른 구석에 있는 수납장 아래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무언가 놀란 듯한 표정인걸 보니 아마 켄넬에서 나오다 몸이 문에 걸렸거나 문을 쳐서 난 소리에 놀란 것 같았다. 벽 고정형 수납장인데 바닥과 수납장 사이의 높이가 라이스가 앉거나 누워 쉬기 딱 좋았다. 좋은 자리 잘 찾았네 싶다가 '아차!' 싶었다. 집에 올 때 겁나서 켄넬에 지려 놓은 대변 생각이 났다. 라이스가 놀랄까 봐 건드리지 못했던 건데 이때다 싶었다. 휴지와 탈취제를 가지고 와 치우고 깨끗하게 닦아 주었다. 속이 다 시원했다. 켄넬을 치울까 하다 그래도 하우스 훈련 하거나 하며 켄넬이 익숙하면 좋을 듯해서 깨끗해진 켄넬에 귀여운 담요를 깔아 주었다.


위액트 입양임보 담당자분들이 계신 채팅창에 켄넬에서 나온 라이스 사진을 보냈다. 예상보다 빨리 나왔다며 좋아하셨다. 우연히 벌어진 일인 데다 의도치 않게 나버린 쿵 소리가 무서워서 켄넬로 다시 못 들어간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듯 라이스가 내디딘 작은 용기에 크게 기뻐하는 그분들의 마음과 내 마음 또한 같았다. 나 역시 켄넬에서 나온 라이스가 대견해서 왠지 자랑하고 싶었던 것 같다.


사람을 낯설어하는 듯한 라이스를 위해 방에서 천천히 걷고 낮게 앉아서 가까이 다가가는 중이었다. 행동도 조심했지만 사람의 목소리도 낯선지 말을 해도 움찔하는 것 같아서 이름을 자주 부르고 이런저런 말을 걸고 있었다. 예전에 무늬를 입양했을 때, 아가들에게 그러하듯 자기 전에 책을 읽어줬던 게 생각났다. 무늬에게 효과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좋은 음악을 들은 식물이 곧고 튼튼히 자란다는 연구 결과를 어딘가에서 본 적 있기에, 예쁘고 아름다운 말을 라이스에게 들려주는 게 나쁠 건 없겠지 싶었다.

나에게 책을 읽어준다고요? 아흠ㅡ 졸려

책장에서 한강 작가의 소설 '흰'을 골랐다. 날개, 모래, 달, 각설탕, 흰나비처럼 흰 빛을 띤 65개의 사물들에 대한 짧은 글을 엮은 책이었다. (심지어 중간쯤엔 '쌀과 밥'도 있었다! 쌀=라이스) 하루 분량도 길지 않았고 글 수도 2달 정도 읽어주면 딱 좋아 보였다. 모든 개는 한없이 투명하고 순수하다. 특히나 라이스 같은 아기 강아지는 세상의 편견을 학습하지 않은, 그야말로 새하얀 눈처럼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상태다. 아기 라이스가 차분히 세상과 만날 준비를 하며 온 마음으로 품어줄 가족을 만날 때까지, 아름다운 문장들로 라이스의 밤을 수놓아줘야겠다. 잘해보자 라이스!


켄넬 밖의 삶, 나쁘지 않은걸?



이름 : 라이스

별명 : 라이쮸, 쌀밥이, 누룽지, 이쮸, 피카츄라이츄, 애기, 강냉이 계속 늘어나는 중(별명부자 카더가든 엉아 기다려!)

성별 : 남

나이 : 9개월

몸무게 : 꽉찬 10kg

구조단체 : 위액트 (http://weactkorea.org/)


라이스타그램으로 라이스의 일상을 확인하세요 :-)

https://www.instagram.com/dearest_r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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