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견 임시보호 3일 차
임시보호를 하게 된 강아지 라이스는 문경의 한 외양간에서 50여 마리의 개들과 서로의 오줌과 썩은 사료를 먹으며 하루하루 지내다, 처참한 상황을 인지한 주민들의 제보로 위액트의 손에 구조되어 새 삶을 찾게 된 아이다. 방치되고 학대(처참한 환경에서 살게 한 거니 일종의 학대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되었다 보니 당연하게도 라이스는 사람에 대해 좋은 기억이 없다. 타고난 성정도 있겠지만 자라며 봐온 환경으로 인해 라이스는 사람뿐 아니라 모든 자극에 대해 경계가 심하고 겁이 많은 편이었다.
구조 후 위액트의 보호소에 머물며 단체의 크루분들과 봉사자 분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날 선 감각을 둔감하게 만들며 안정을 찾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어느덧 외양간에서 함께 구조된 아이들 중엔 하나 둘 가정으로 임시보호를 가거나, 좋은 기회로 입양까지 간 친구들도 생겼다. 그에 비해 겁이 조금 더 많고 신중한 성향인 라이스의 새 출발은 조금 늦어지고 있는 중에 우리 집에 오게 된 것이다.
임보 3일째, 라이스는 여전히 작은 서재방에만 머물고 있다. 방 안에서도 그 방의 가장 구석진 곳에 웅크리고는 불안한 눈빛으로 오가는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사각형 방의 벽과 벽이 만나는 꼭짓점, 위로는 라이스가 서면 머리가 딱 닿을 만큼의 높이에 선반이 있는 곳이다. 뒤쪽과 위쪽을 막아주는 구조인 데다 방문을 살짝 비스듬하게 볼 수 있기에, 자기 딴에는 그곳이 방 안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느끼게 했나 보다.
그래도 켄넬에서 나온 뒤 다시 들어가지는 않고 있는 걸 고무적으로 보고 있다. 라이스가 스스로 이 집이 안전하다는 걸 깨닫게 하기 위해 일주일 가량은 밥 주고 배변만 치워주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다행히 하루 3끼 모두 잘 먹는다. 건사료만 줬을 때의 반응이 시원찮아서 습식사료와 섞어 줬더니 폭풍 흡입한다. 첫날과 둘째 날엔 물을 잘 안 마셔서 걱정했는데, 셋째 날부터는 물도 벌컥벌컥 잘 마신다. 쉬야랑 응아만큼은 자신감 있게, 시원하게 해결하는 라이스. 변질도 좋고 소변의 색도 나쁘지 않다. 참혹한 환경에서도 큰 탈없이 건강하게 자라주어 고맙다.
라이스가 자리 잡고 누운 곳에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손바닥으로 손을 보여주고 등 쪽과 엉덩이에 조심스럽게 대 봤다. 움찔하는 듯 배 쪽이 울렁거리니 등 쪽의 털도 미세하게 움직였다. 솔직히 라이스에게 다가가기가 조금 무서웠지만, 개들은 상대의 감정을 귀신같이 눈치채는 아이들이니 들키지 않으려 짐짓 의연한 척했다. 터치를 허락해 주다니 그 역시 좋은 사인이지 싶었다. 우리 사이 희미하게나마 그린라이트가 켜진 걸까?
NO. 아니었다. 문제는 밤에 생겼다. 그 얌전하고 조용했던 라이스가 잠을 안 자는 것이었다. 라이스가 있는 방과 우리의 침실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자리해 있어서 침실의 문을 활짝 열고 침대에 누우면 라이스가 있는 방이 훤히 보인다. 라이스는 밤이 되자 달의 기운을 받은 듯 은둔하던 구석을 박차고 나와 빠르게 방을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 땅에 박힌 바위처럼 묵직해 보였던 라이스의 엉덩이가 그렇게 가벼웠을 줄이야! 급한 걸음으로 무언갈 찾는 듯하다가 뭔가 속상하다는 듯 "히잉"하고 칭얼거렸다. 안 들리는 척 무시해야 하나? 반응을 보이면 계속할 수도 있는데.
방의 이것저것을 건드리며 나는 소음 와 신나 보이는 발걸음, 칭얼거리는 목소리에 잠을 이루기 힘들었다. 역시나 새벽 출근을 해야 하는 남편은 복도 반대편 끝의 옷방에 토퍼매트리스를 펴고 자야 했고, 나는 이따금 라이스가 있는 방을 들락날락하며 낮에 참았다 한꺼번에 하는 듯한 배변을 치우고 라이스를 진정시켜 보았다. 무늬는 침대에서 연신 뒤척이는 걸 보니 밤잠을 설치는 듯했다.
소란스러웠을 보호소를 나와 따뜻하고 포근한 공간이 어색해서 그런가?
그래도 처음으로 혼자 조용히 잘 수 있는 건 좋은 거 아닌가?
게다가 그다지 날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왜 칭얼거리는 거지?
내 머릿 속이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해지는 것과 동시에 라이스는 30분~1시간 간격으로 푸닥거리를 하듯 분주하게,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규칙적으로 소란을 떨었다. 라이스가 좀 진정했다 싶을 때 나 역시 조금이라도 자보려 눈을 감았으나, 작은 소리에도 웹캠 앱을 실행해 라이스를 살펴보느라 도통 잠을 자지 못했다. 새벽 5시 반, 남편의 알람소리까지 듣고서야 밤을 꼬박 새웠다는 걸 알았다. 남편이 출근 준비를 하느라 움직이고 나 역시 무늬 아침 산책 겸 남편 라이딩을 위해 거실과 화장실을 돌아다니자 라이스는 조용해졌다.
포털 사이트에 '시차'라고 검색하니 서울을 기준으로 주요 도시의 현재 시간을 표시한 지도가 떴다. 지금 시간은 저녁 7시 38분. 상파울루와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아침 7시 38분. 어느 책에선가 스치듯 읽은 기억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땅을 파고 파 들어가면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쯤에서 하늘을 볼 수 있다고 했다.(아닐 수도 있다.) 그때부터 내가 사는 곳에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라면 이 두 나라를 떠올렸다.
이번 새 식구 라이스는 브라질의 상파울루쯤에서 살다 온 강아지인가 싶다. 12시간의 시차만큼이나 아직은 거리감이 느껴지는 우리의 관계. 땅을 파 지구 반대편에 닿을 기세로 라이스 마음속 어둡고 깊은 곳을 향해 들어가려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닿지 않을까. 그때까지 우리의 낮과 밤은 곱게 접어서 서로 맞닿게 해 놔야겠다.
잘 부탁해. 라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