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견 임시보호 4일 차
이 글은 구조견 라이스를 임시 보호하며 끄적인 일기입니다.
2022년 12월 31일. 직장인 남편, 프리랜서 아내, 유기견 출신 반려견 무늬(4살, 여아)가 사는 집에 임시보호(이하 임보) 하숙견이 왔습니다. 임보견의 이름은 라이스. 라이스는 동물구조단체 위액트가 구조한 개로, 경북 문경의 한 방치된 외양간에서 썩은 사료와 고인 물로 연명하며 자가번식한 50여 마리의 개 중 하나. 발목까지 오물이 차오르던 처참한 환경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강인한 아이지만, 살아온 날들이 지옥 같았던 탓에 주위 경계가 심하고 특히 사람이 낯설고 두려워서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았습니다. 과연 라이스는 다시 한번 우리 인간에게 기회를 줄까요? 라이스와 저희 가족이 함께 보듬으며 노력해 온 소중할 날들을 아로새기기 위해 기록합니다.
오늘은 라이스를 임시보호 하고 처음으로 집을 비워보기로 한 날이었다. 라이스가 혼자서도 잘 있고, 함께도 잘 있는 둥글고 씩씩한 아이가 되었으면 했다. 그래서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아직 우리와 애착관계가 생기기 전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서로의 부재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집을 비워보기로 했다.
전날 밤 누워서 남편과 조잘조잘 떠들며 플랜 A, B, C의 시나리오를 복기했다. 잠들기 전 머릿속으로 시물레이션도 해봤다. 당연히 우리의 바람대로 하울링 한번 하지 않고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는 멋진 라이스를 상상했다. 우리가 예상하기에 라이스는 가족 구성원의 부재를 이해할 만큼 긴장을 내려놓지 않은 듯했다. 그래서 누군가 집에 있고 없음을 인지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집을 나가는 길에 회사에 있는 남편에게 틈나는 대로 펫캠으로 아이들을 살펴 달라고 부탁했다. 라이스의 반응에 따라 언제든 다시 집에 돌아올 수 있어야 했다.
라이스는 처음 집에 왔을 때 그대로 서재방에 머물고 있었다. 라이스와 무늬는 아직 완전 합사를 하지 않은 상태였고 아침저녁으로 짧게 인사하고 있는 사이여서 안전문을 설치해 두었다. 무늬는 우리가 집을 비울 때면 안방이나 거실, 서재방 등 어느 곳에나 무늬의 침대나 소파가 있기에 자기 마음에 드는 곳에 머물곤 한다. 지금은 서재방에 라이스가 있으니 안방 침대나 거실 소파에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나올 땐 안방 침대 한가운데 편히 누워 외출 준비를 하는 날 눈으로 좇고 있었다. 가끔 함께 나가고 싶다고 애교를 부릴 때도 있지만 다 함께 외출인지, 아니면 자기는 집에 있어야 하는지 빠르게 알아챈다. 입양 초창기의 무늬는 우리가 외출을 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 자리에 누워 잠만 자서 걱정이었다. 하지만 어느덧 돌아다니며 자리도 옮기고 물도 마시고 털이 눌릴 정도로 꿀잠을 자고 있다가 우리가 돌아오면 엄청 반가워하는 멋진 아이가 되었다.
라이스도 혼자 있음을 외로움과 두려움과 같은 어두운 뜻으로 치환하지 않는 아이로 자랐으면 한다.
집을 나갈 때부터 펫캠을 켜고 라이스가 기거하는 곳을 살폈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라이스는 부산스럽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집에 있어도 조용할 때나 밤중에 혼자 신나서 놀 때 하는 행동과 비슷해 보였다. 라이스와 무늬를 집에 두고 운동하러 가는 정도의 외출은 가능하겠구나 싶었다. 운동을 하는 동안 남편이 펫캠을 살펴줬다. 라이스는 특별히 불안함을 표현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고 했다. 분리불안이나 고립불안이 있는 개들은 다양한 행동으로 불안을 표출한다. 보호자의 냄새가 나는 물건, 이를테면 실내화나 옷, 침구류 들을 물거나 끌어와서 자신의 곁에 둔다. 쓰레기통을 뒤지거나 휴지를 뽑아놓는 등 불안감을 해소할만한 거친 장난을 친다. 때에 따라선 벽지나 배변패드를 찢거나 방문 몰딩, 의자 다리 같이 딱딱한 가구를 깨물거나 긁기도 한다. 다행히 우리의 씩씩한 라이스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라이스가 만나게 될 가족의 거주 환경이 우리 집보다 라이스가 살기 편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으나, 높은 확률로 대한민국 도시의 반려견은 아파트와 같은 공동 주택에서 살고 있기에 라이스가 공동 주택의 인간 이웃들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도록 함께 하나씩 해나가고 있다. 그중 집에서 짖거나 하울링을 하는 등 소음을 유발할 수 있는 분리/고립 불안성 문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무늬 입양 초반을 떠올리며 라이스와도 연습해 보려 한다. 무늬 땐 일부러 짧은 외출을 했다 들어오며 무늬가 익숙해질 수 있도록 천천히 연습했다. 가족이 집을 비워도 건강하고 무사히 돌아온다는 기억을 자주 만들어주었다. 그렇다고 집을 자주 비우지 않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 집은 무조건 무늬와 함께 할 수 있는 일, 함께 갈 수 있는 곳이 가족 외출의 기준이 되었다.
일관된 보살핌을 제공하는 보호자에게 반려견은 무한 신뢰로 보답한다. 시간과 노력을 쌓아 탄탄한 유대감을 쌓으면 서로의 부재를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라 믿는다. 물론 지금 라이스의 상태로는 보호자로서의 연대감 쌓기 이전에 인간의 목소리와 손짓, 몸짓 등 인간에 대한 불신을 거둬 드리게 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렇기에 무늬 때보다 조금 어렵지만 많이 내려놓고 하나씩 점진적으로 해나가려 한다.
하나 더, 내가 봐온 개는 기쁨과 즐거움, 반가움과 같은 환희의 감정도 컹컹거리는 짧은 짖음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잠깐씩 짧게 짖는 것 또한 이웃에게는 소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무거워지긴 한다. 이 처럼 모든 게 다분히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서 수립된 규칙을 무늬에게 그러했듯, 라이스에게도 알려줘야 한다. 인간과 개가 함께 어우러져 살기 위해 서로 배려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무늬와 라이스, 개친구들이 우리에게 해주는 배려와 양보는 꼭 어떻게든 다른 식으로 갚아나가야겠다. 깨끗한 잔디와 큰 나무가 있는 멋진 공원 산책 코스를 만들어준다거나 함께 있는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놀아준다거나.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라이스가 납득할 수 있는 속도로 조심스럽고 천천히 해나가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우리의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