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31일. 직장인 남편, 프리랜서 아내, 유기견 출신 반려견 무늬(4살, 여아)가 사는 집에 임시보호(이하 임보) 하숙견이 왔습니다. 임보견의 이름은 라이스. 라이스는 동물구조단체 위액트가 구조한 개로, 경북 문경의 한 방치된 외양간에서 썩은 사료와 고인 물로 연명하며 자가번식한 50여 마리의 개 중 하나. 발목까지 오물이 차오르던 처참한 환경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강인한 아이지만, 살아온 날들이 지옥 같았던 탓에 주위 경계가 심하고 특히 사람이 낯설고 두려워서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았습니다. 과연 라이스는 다시 한번 우리 인간에게 기회를 줄까요? 라이스와 저희 가족이 함께 보듬으며 노력해 온 소중할 날들을 아로새기기 위해 기록합니다.
무늬와 라이스! 찐친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어느덧 6일 차.
라이스는 아직 목욕을 못한 꼬질이 상태다. 우리 집에 오기 전 보호소에서 싹 씻겨 주셨는데, 오는 길에 켄넬에 대변 실수를 하고는 깔고 뭉개고 이틀 정도 보내서 움직일 때마다 꼬릿 한 냄새가 난다. 그렇지만 여전히 겁이 많고 긴장감이 높은 편이라 라이스를 안아 올리기도, 그렇다고 목줄과 리쉬로 함께 걷기도 어려워 보여서 미루고 있다. 그래도 내일이 주말이니 남편과 합심해서 어떻게든 씻겨야 할 것 같다.
라이스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낮에는 주로 서재방에 머물고 있다. 집에 있을 때면 조용히 날 따라다니며 발 밑이나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의 거리에 누워서 자리를 잡는 것으로 애정을 표현하는 무늬는 역시나 서재방에 따라 들어왔다. 초반에는 구석에 누워 눈만 굴리는 라이스를 본체만 체 했었다. 분명 라이스의 존재를 인지했는데 투명 강아지라는 듯 못 본 척하고는 좋아하는 자기 방석에 누워 있다가 내가 방을 나가면 라이스에게 눈길 한번 안 주고 함께 방을 나왔다.
개들은 좋겠다 똥 묻히고 있어도 예뻐서
무늬는 그동안 임시보호견과의 동거를 세 번이나 경험했다. 라이스를 포함한 우리 집 임보견은 우연히 모두 퍼피였다. 무늬는 평소 집이 아닌 곳에서 개 친구들을 만나도 성견이나 자신과 비슷한 나이 때의 아이들과는 곧잘 놀았지만, 몸이 작거나 어린 친구들은 몇 번 모른 척하다 계속해서 자신에게 다가오면 어떤 식으로든 싫은 감정을 표현했었다. 무늬의 성향을 보면 퍼피와 맞지 않을 것 같긴 하다. 집에서의 무늬는 고양이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집에서도 조용하고 우아하게 움직인다. 우리와 함께 있을 때도 곁엔 있지만 다가와서 쓰다듬어 달라는 식의 애정을 갈구하는 행동을 하지 않고, 다만 같은 공간에 누워 사랑스럽게 바라봐서 결국 우리가 다가가게 만드는 고수 강아지다. 밥을 줘도 허겁지겁 먹지 않고 마치 맛을 음미하는 듯 천천히 꼭꼭 씹어 먹는다. 물론 산책 나가기 전에나 다 함께 외출하기 전, 좋아하는 간식으로 노즈워크를 할 때, 자기 전 치카껌 먹을 때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순간엔 뱅글 돌거나 엎드렸다 점프 뛰었다 하며 개 다운 천진난만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평상시의 모습은 영락없는 도도하고 기품 있는 공주과의 아이다.
그런 성격을 가진 아이라 그런지 무늬가 우리 집 임보견들을 대하는 걸 보면 퍼피 특유의 개구쟁이 기질과 부산스러운 움직임을 성가셔하는 듯 보였다. 마치 중학교에 입학한 언니가 초등학교 동생을 대하듯 아가들이 뛰어놀면 '너 공놀이해? 난 그거 너무 유치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소파 위에 엎드려서 쳐다보다 조용한 침대나 서재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혼자 있을 땐 자기도 공놀이 너무 좋아하는 거 우리는 알지만) 뒤꽁무니에 붙어 따라오려고 하면 짧고 굵게 성질 한번 부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런 무늬의 성향을 잘 알기에 늘 임시보호를 할 때 가장 큰 걱정이 무늬와 임보견의 관계였다. 처음 임시보호 때는 두 아이의 사이를 조율해 볼 세도 없이 얼렁뚱땅 시간이 갔었다. 두 번째 임시보호 때는 완전 합사에는 성공했지만 하루의 절반은 서로의 공간을 마련해줘야 했고(정확히 말하면 무늬의 독립적인 공간을 확보해줘야 했다.) 밤에는 따로 잤었다. 그리고 두 아이가 함께 노는데 노는 건지 다투는 건지 잘 몰라서 과열 양상을 보이면 둘을 떼어놓아야 하나 그냥 둬야 하나 고민한 적도 많았다. 무늬에게는 원하지 않는 불편한 상황을 만들어서 스트레스를 주는 건 아닌지 싶었고, 임시보호견에게는 영문도 모른 채 터줏대감 강아지의 눈치를 보게 하는 건 아닌지 늘 걱정이었다.
라이스는 임시보호한 세 아이 중 아직까지는 가장 조용하고 의젓한 편이었다. 그래서 하루하루 갈수록 '그래도 라이스는 무늬와 잘 맞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둘의 궁합에 대한 기대를 살짝 하기도 했었다.
오늘 낮의 일이었다. 역시나 서재방의 내 옆 자리에 놓인 방석에서 한숨 자고 일어난 무늬가 앞뒤로 깊게 기지개를 켜며 라이스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미약하기 꼬리를 치기 시작했다. 의외였다. 무늬는 그동안의 임시보호견에게 관심이 없거나 귀찮아 하기 일쑤였는데, 이렇게 먼저 호감을 보이는 건 라이스가 좋아서인 걸까 혹은 많은 친구들을 만나고 또 임시보호도 세 번째가 되다 보니 새 친구에 대해 조금 적극적으로 변한 건가 알 수 없었지만 두 가지 다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무늬가 라이스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점!!
둘은 한참 서로의 몸 이곳저곳의 냄새를 맡았다. 플레이바우 자세까지는 아니지만 앞발을 가볍게 구르거나 살짝 뛰거나 반원을 그리며 돌며 유쾌한 동작으로 서로 인사를 나눴다. 무늬가 좀 더 적극적인 편이었고 라이스는 함께 방 안에 있는 나를 의식하는지 힐끔 거리거나 그래도 이 집주인 느낌인 무늬의 기에 눌렸는지 살짝 얌전한 몸짓이었지만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잘 노는 것 같아서 내버려 두고 간간히 사진과 영상을 찍으며 나는 내 할 일에 집중했다. 몇 분 가량을 그렇게 가볍게 노는 듯했다. 잠시 뒤 잠잠해져서 보니 라이스는 다시 자신이 좋아하는 구석 자리에 누워 있었고 무늬는 방석 위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다시 잠든 너네들
큰일이다. 이렇게 되고 보니 둘의 사이를 너무 기대하게 돼버린 것.
무늬와 라이스의 사이, 생각보다 괜찮을 것 같다. 아니, 이러다 정말 찐친이 되면 어쩌지? 아아. 너무 즐거운 상상을 멈출 수가 없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