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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레인 Feb 06. 2023

공룡은 살아있(었)다

@ 드럼헬러


로키 산맥은 1만년 전 빙하기부터 형성된 지역으로 지구 생명의 기록이다. 산, 호수, 폭포, 협곡의 위풍당당한 자연미가 너무 압도적이어서 나는 이곳에서 커피 한 잔 없이도 각성 상태였다. 이 '로키'가 앨버타 여행의 주연배우라면, 오늘 간 황무지 '드럼헬러'는 씬스틸러랄까. 


드럼헬러는 지금은 '세계의 공룡 수도'라 불리지만 20세기 초에는 캐나다 최대의 광산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 이름도 당시 광산 사업가였던 Samuel Drumheller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한 동전 던지기에서 이긴 결과였다. 드럼헬러가 명실상부한 고생물학의 메카로 변모한 이유는 세월이 흐르면서 석탄이 천연가스와 석유로 대체되는 동안, 화석이 계속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개척자와 광부의 분주한 숨결은 까마득한 과거의 흔적을 찾는 과학자와 여행자의 발길로 바뀌었다. 오늘은 로키의 떠들썩함에서 벗어나 중생대의 고요와 신비에 한 발짝 발을 디뎠다.



자동차가 놀라면?


캘거리에서 출발해 앨버타 9번 도로를 타고 1시간째, 계속 나른한 벌판만 봐서 졸음이 올 때 즈음 유채꽃으로 뒤덮인 광활한 밭이 눈을 사로잡았다. 저 멀리 지평선 끝까지 온통 노란 가루를 뿌린 듯 환하다. 기온이 낮은 캐나다는 7월이 유채꽃 절정이다. 유채씨로 만든 카놀라유는 캐나다의 발명품이기도 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해바라기씨유 품귀 현상이 생기면서 카놀라유 가격이 폭등했다던데, 샛노란색이 흐드러진 걸 보니 그나마 풍년인 듯싶다.


그나저나 자동차가 놀라면? 정답은 "카놀라유". (죄송해유)

카놀라유 농장


노란빛에 취해 대평원을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푸석하게 푹 꺼진 땅 위에 들어선다. 이 지형은 초목이 자랄 수 없어서 이름부터 나쁜 땅, 배드랜드(Badlands)라 불린다. 이렇게 거칠고 메마른 땅이 2억 년 전에는 동식물이 번성했던 열대림이었다고 하니...


오늘의 여정 : Calgary - 호스슈 캐년 Horseshoe Canyon - 호스띠프 캐년 Horsethief Canyon - 로열 티렐 박물관 Royal Tyrrell Museum - 후두스 Hoodoos - Calgary


Badlands로 진입


화석을 발견하면, 연락 주세요.


서로 차로 30분 거리인 두 군데의 협곡, Horseshoe Canyon과 Horsethief Canyon부터 들를 예정이다. Horseshoe Canyon 근처에서 화석이 종종 출토되다 보니, 이런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만약 화석을 발견하면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 사진을 찍어 연락해 주십시오."   2년 전에도 여기서 12살 소년이 백악기 공룡뼈를 발견해서 떠들썩했다고 한다. 우리라고 못 찾을 거란 법이 있나. 눈을 크게 떠보자.


조금 가파른 자갈길을 따라 내려가니 곧 U자형 협곡의 바닥에 닿았다. 조각나고 메마른 언덕들이 긴 세월 차곡하게 쌓은 밤색 줄무늬를 전시하며 사방에 솟아 있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까마득한 과거, 공룡이 배회하던 곳에 내린 기분이다. 우리도 Red Deer 강이 깎아둔 사잇길을 따라 거닐었다. 앞서 걷던 한 아이가 언덕 꼭대기를 한달음에 올라가자, 우리 애들도 잠깐 머뭇거리다 금세 옆 언덕으로 올라갔다. 가파른 비탈에 미끄러질까 나도 따라갔는데, 이건 너무 색다른 하이킹이잖아! 화석은 못 찾았지만 정말 재미있었다. 이렇게 하이킹 구역을 제한하지 않으니 하이커들이 화석 발견에도 기여하고 서로 윈윈인 것 같다.

Horseshoe Canyon


잠시 비지터 센터를 들렀다가 Horsethief Canyon으로 갔다. 19세기말에 도둑들이 여기에 밀수한 가축을 숨겨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미국과 캐나다는 동일한 지명이 많은데, 이 말도둑도 미국에 몇 군데 있다. 구글맵을 잘못 찍어 경로 계산을 잘못하거나, 엉뚱한 곳에 숙소를 예약하는 불상사를 조심하자. (내가 그럴 뻔했다.)


누가 이곳을 보급형 그랜드 캐년이라 했나! 위용은 덜할지라도 낭떠러지에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이 뻔뻔하게 손님을 맞는 호스씨프 캐년이 나는 더 무서웠다. 절벽 바로 옆에서 피크닉을 하는 용자 무리가 보였다. 아이스박스에서 먹을거리를 주섬주섬 꺼내 막 만찬을 시작하려는 폼이다. 피크닉 좀 해 본 사람들... 그들의 여유에 기대 나도 심호흡을 하며 협곡 앞에 서본다. 이곳의 광활함과 황량함은 무섭기만 한 건 아니었다. 공포스럽지만 평온하기도 했고, 자제해야겠다 싶으면서도 왠지 모험을 꿈꾸게 된다.


Horsethief Canyon 낭떠러지의 용자들



공룡은 살아있(었)다.


공룡(恐龍). 무서울 '공' 자에 상상의 동물인 '용'자를 쓰니, 학창 시절의 나는 공룡이 전설인 줄 알았다! 변명하자면 학교에서는 진화론을 배웠지만, 교회에서는 창조론을 배웠는데, 나는 과포자이자 냉담자가 되어가던 중이라 무엇 하나 제대로 파지 못했으니 혼란은 필연적이었다. 머리가 굵어지면서 진화론은 가설이 아니라 과학이라는 걸 겨우 알게 된 후에도 여전히 석연치 않았다. 생명체가 생긴 과정은 머리로는 수긍해도 가슴에 팍 와닿지는 않는 거다. 최초의 대폭발 이후 150억 년 간 수많은 원소들이 생겨나고, 이 에너지가 수십억 년을 우주에 떠돌다가 우연이 겹치고 겹치고 또 겹친 화학반응 끝에 마침내 생명체가 탄생했다는 논리. 이 기막힌 우연의 개연성을 영겁의 세월로 답하는 이야기는, 마치 '복음을 접하지 못한 선사시대인들은 죽어서 지옥에 가나요'라는 질문에 '개미도 인간의 정신세계에 닿을 수 없다'라고 답하는 목사님의 설교보다 조금 나을 뿐이었다. 가끔은 이런 의문 앞에 명쾌한 사람들이 부럽다. 이런 시샘이 나의 독서의 원동력이 되길 바란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나에게도 득오의 순간이 찾아오지 않을까.


해는 아직 중천에 떠 있었다. 잠시 실내에서 몸을 식혀야 했다. 세계적인 고생물 박물관 Royal Tyrell Museum의 16만 개가 넘는 공룡화석 컬렉션은 어마어마했다. 수집된 화석의 1%만 주어진 시간에 전시되고 나머지 표본은 다른 곳에 보관 중이라고 한다. 공룡의 몸속과 발자국을 살펴보며 새삼 뇌었다. 살아 있었어... 유리창 너머로 화석들이 전시와 연구를 위해 준비되는 것도 구경했다. 연구원들이 표본 조각들을 맞추는 걸 보니 시트콤 <Friends>의 고고학자 로스는 참 나일롱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1층에는 작은 극장이 있었는데 마침 화석 표본 원정대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상영 중이었다. 끝없는 투지로 위험을 불사하며 과거의 자취를 탐사하는 과학자들의 이야기였다. 고작 악어, 공룡, 새의 뼈 조각을 들고서도 마치 엄청난 퍼즐 조각을 맞췄다는 듯 눈빛이 얼마나 빛나던지! 인디아나 존스보다 훨씬 더 멋있었다.


Royal Tyrrell Museum



밤에 변신하는 거인


마지막 장소인 캐나다 배드랜드의 아이콘, Hoodoos로 갔다. 후두스는 오랜 침식으로 버섯 모양이 된 거대한 흙기둥 들인데, 가까이 다가가보니 표면이 너무 연해 세게 치면 부서져 내릴 거 같았다. 18세기 원주민들은 이 기둥들이 밤에는 거인 신으로 변해 침입자들에게 돌을 던진다고 믿었다고 한다. 나에겐 바람과 비가 이렇게 기괴한 모양으로 땅을 깎는다는 것도 거인 신만큼이나 초자연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능선을 따라 올라가니 기이하고 고요한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나는 인류의 운명과 행동에 개입하는 신이 아니라, 우주의 질서 있는 조화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스피노자의 신을 믿는다... 내게 신이란 우주만물에 대한 나의 경외감이다. 아인슈타인
Hoodoos에서 마침내 화석 발견?

                    


참, 박물관 옆에 아주 작은 교회가 있었다. 이름도 The Little Church. 여기서 실제 예배나 결혼식도 한단다. 이십몇 년 만에 예배당에 들어가 봤다. 6명이 앉을 만한 작은 공간 앞으로 목회석 쪽에는 Peace To All Who Enter, 출구 쪽에는 Grace be with You라고 적혀 있었다. 완전 귀엽고 사랑스러운 곳이다. Peace.


The Little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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