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뱀 죽이기

by 시누의 서재

린치핀, 도마뱀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과 그 도마뱀을 잠재우는 여정은 이 책 한 권에서 시작됐다.


세계적인 마케팅의 대가 세스 고딘의 <린치핀>은 대체 불가능한 존재, 예술가가 되는 것을 강조하는 책이다.

산업혁명 이후 인류를 현재와 같은 엄청난 발전과 부 위에 군림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공장' 시스템에서 벗어나

'나'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필연적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KakaoTalk_20200521_161613744.jpg <린치핀> 세스 고딘 저

컨베이어 벨트가 24시간 가동되고 수백 개의 직조기계 앞에서 직물을 짜는 그런 '공장'말고도 현대의 회사는 모두 내가 아닌 누군가가 나를 대체해도 조직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공장'이라고 보는 작가의 관점이 재밌었다.

물론 짧은 문장으로 약간은 관념적인 설명들을 길게 늘어놓는 화법에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었다.


그럼에도 또다시 영 흥미가 붙지 않는다고 100페이지도 채 읽지 않고서 다른 책으로 넘어갈 수는 없었기에 진득하게 읽어나갔다. 그러던 중, '도마뱀'이라는 단어가 계속 나오기 시작했다.


'내 안의 도마뱀', '내 머릿속의 도마뱀', '도마뱀뇌', '도마뱀은 끊임없이 속삭인다'.


몇 해 전 한창 인터넷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파충류 뇌'를 의미하는 것인가를 생각하며 읽어나가다 '저항'이라는 개념을 마주하는 순간 이제껏 이백 쪽의 페이지를 읽는 동안 안갯속을 걷는 듯한 느낌이 말끔히 사라지고 흥미로운 책으로 변했다.


Amygdala.jpg 편도체(아미그달라)의 사진


도마뱀뇌, 원시의 뇌 등으로도 불리는 편도체(아미그달라)는 인간의 생존과 관련된 뇌의 한 부분이다.

먼 옛날, 인류의 조상이 수렵 생활을 할 때 나무 열매를 따다 맹수의 습격을 받지 않도록 도와주고 동물을 사냥할 때 살아남을 수 있도록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조상들의 머릿속 도마뱀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면 신체가 많이 비대해진 지금도 야생동물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인류는 그 옛날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마뱀뇌는 빠르다. 본능적이고 예민하다. 그리고 강력하다.

생존을 위한 선택을 해왔던 기관이기에 도마뱀뇌가 작동하면 다른 판단을 내리고 좀 더 이성적인 선택을 하기가 쉽지 않다. 거대한 불곰이 턱밑까지 쫓아온 순간에서 도망치는 길 옆에 피어난 자그마한 들꽃이 아름답다는 감상적인 생각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스 고딘은 도마뱀뇌는 '저항'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일에 뛰어들고 가슴속에 품고 있던 사표 한 장 대신 품고 있던 꿈을 향해 달려가야 할 때 도마뱀뇌는 '안될 거야'라고 외친다. 도마뱀뇌는 안정적인 일을 하라고 한다.

낯선 사람을 만나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도 도마뱀뇌는 위협이라고 느낀다.

회사의 위계질서 속에서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결정에 대해 반론을 제시하는 것도 도마뱀뇌는 위협이라고 느낀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세스 고딘은 이때 저항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말한다. 저항을 뚫고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개인이 살아왔던 환경과 방식에 의해서 프로그램된 생존(또는 현재의 생활)에 도움이 되는 안정적인 길이 있을 것이다. 그 길을 벗어날 때 거세게 부는 저항을 이겨내야 한다고 한다.


나의 안전한 길은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공부 열심히 하기' 등의 평범한 것 말고 몇 가지 생각나는 게 있었다.

나는 전화를 무서워한다. '전화를 하다 말을 버벅대면 어쩌지? 상대방이 나를 바보로 생각하지 않을까?'라는 불안이 어렸을 때부터 있었다. 요즘도 업무적인 용건이 아니면 전화는 꺼려지는 존재이다. 심지어 음식점에 주문을 넣는 것도 힘들다. 낯선 사람에게 그냥 다가가서 말을 거는 것도 물론 잘 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불쑥 어딘가 찾아가서 서글서글 말을 잘 꺼내곤 하는데 나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나열하려면 수천 가지는 될 것이다. 중요한 건, 뭔가 해야 하는 것이 있는 순간이나 하고 싶은 것을 위해 필요한 순간 배가 꿀렁거리면서 저항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주로 불안과 걱정의 형태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것들은 언제나 시간이 지나 생각했을 때 했어야만 하는 것들이었다. 그때 했다면 지금쯤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선택들이었고 시간을 수개월 또는 수 년을 앞당길 수 있는 선택들이었다.

학교에서부터 참 안정적인 길을 따라왔다. 시키는 대로 하고 남들이 걸어간 대로 걸으면 '위협'을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 길을 걸으며 마주치는 것은 좋은 일들이었다. 나쁘지 않은 점수, 어른들의 칭찬, 친구들과의 원만한 관계, 어딘가의 합격 안내 문자. 분명 좋은 것들을 마주하는 것은 기쁜 일들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누군가가 설계하고 안내하고 때로는 강요하는 길을 주욱 걷다보니 내가 기르던 도마뱀이 너무 커져버렸다.


나를 위해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에 도마뱀이 발목을 잡았고 가보지 않은 길이라는 '위협'은 그 길을 가지 않는다는 '생존'의 길이 아닌 다른 판단을 못 하게 만들었다. 책에서 도마뱀뇌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예전 모습들이 많이 떠올랐다. 머뭇거렸던 순간들, 해봤던 길을 다시 선택했던 순간들, 철저히 예전의 나와 똑같은 사람이 되었던 순간들. 저항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저항을 의식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항이 불어오는 반대로 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의식적으로 예전의 나라면 하지 않았을 일을 해보기도 했다.

별것 아니었다. 사람들은 친절하게 이야기를 받아주었고 일이 잘못되어 봐야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한잔 안줏거리밖에 되지 않는 사소한 문제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가 기르는 도마뱀은 크다. 나는 겁이 많다 원래. 겁이 많아서, 사람들한테 욕 먹는 게 싫어서 시키는 걸 열심히 하며 살았었다. 하지만 세스 고딘은 한 마디를 덧붙인다. 인간은 '문명화된 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도마뱀뇌를 인식하며 통제할 수 있다고. 별것 아닌 것처럼 저항에 맞설 수 있다고. 이제는 도마뱀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한번 무시해보려 한다. 저항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원하는 결과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동화를 보면 주인공들이 찾는 것은 늪지, 바위계곡, 모래바람과 같은 '저항'을 뚫고 지나가야만 얻을 수 있지 않았던가. 그러니 마음속 도마뱀이 저항하는 것이 느껴진다면 꼭 해야만 하는 것이라 믿고 맞서 나가보자. 한 걸음 나아갔을 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느껴지면 도마뱀은 금세 모습을 감춘다고 한다. 도마뱀은 생각보다 약하다. 호랑이와 맞닥뜨렸을 때가 아니라면, 벼랑에서 발을 헛딛은 순간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도마뱀은 필요하지 않다. 그런 순간에 우리는 과감히 도마뱀을 죽일 수 있다. 도마뱀을 헤치우고 새로운 보물을 얻어보자. 진귀한 것은 아닐지 몰라도 분명 얻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보물일 것이다.



* 세스 고딘은 덧붙인다. 맘에 들지 않는 상사에서 소리 지르고 싶은 걸 말리는 것은 '도마뱀뇌'가 아니라 '양심'이라고. 마음속 목소리가 양심인지는 잘 판단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이미지 출처 :
1) 도마뱀 사진

https://pixabay.com/ko/vectors/%EB%8F%99%EB%AC%BC-%EB%8F%84%EB%A7%88%EB%B1%80-%EB%B9%84%EC%97%B4%ED%95%9C-%EB%8F%84%EB%A1%B1%EB%87%BD-2773403/

2) 편도체 사진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Amygdala.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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