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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다니 May 27. 2019

퇴사 : 잃어버린 철딱서니를 찾아서

2019 히말라야, 인도, 이란 여행기

도라다니

  궤를 이탈한다는 것. 아주 떠난다면 무엇이 두렵겠냐마는 돌아오는 것이 문제다. 따지고 보면 삶은 원형이 아니라 나선형에 가까워서 나이를 먹을수록 중심으로 회귀해야 하는 거리가 늘어난다. 가급적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는 편이 평탄하나, 유독 관성이 강한 사람들이 있다.   

  이탈의 대가는 후불이다. 미래의 내게 모든 짐을 떠안기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그 크기가 얼마만큼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으니, 모든 게 감당이 되면 가는 것이고 아니면 남는 것이다.   

  그럴싸한 모든 이유를 갖다 붙여서 계기라는 걸 만든다 해도 원하는 게 있는 한 결과는 늘 같았다. 그렇다면 재고 따지지 않는 편이 조금이나마 이득일 테지만 언제 내가 그렇게 합리적으로 선택한 적이 있던가. 망설이고 고민하는 데 시간 쓰기로는 우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내게, 모든 걸 내팽개치고 맘 가는 대로 여행을 떠나라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2015년 11월 어느 날, 나는 뜻하지 않게 귀국했다. 영원하리라 믿었던 약 100일가량의 인도 여행에 미처 마침표도 찍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입국했다. 정리되지도 않은 방을 뒤로하고 약 한 달을 언니 방에 얹혀살았다. 나는 다시 나갈 몸이라 생각했기에, 마치 한국을 여행 온 듯, 그렇게 이방인처럼 굴었다. 하지만 다시 나가게 되는 일 따위는 없었다. 한번 끊긴 여행의 흐름은 일상의 관성을 이기지 못했다.   

  그로부터 2019년 1월이 되기 전까지 총 네 번의 비행기 표를 예매했었고, 그중 세 번은 환불, 한 번은 시간을 놓쳐 그냥 버려야 했다. 그때까지 내게 떠난다는 건 결심이나 이벤트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건 “이후의 삶”에 대한 완벽한 계획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었으며, 변화한 삶의 각도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했다. 어쨌든 나는 결국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할 테니까.

마지막 수업

  그 해의 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겨울이 유독 따뜻해서 꽃이 피는 줄도 모르고 봄을 맞이했었다. 계절학기로 들었던 영어회화의 마지막 수업을 끝으로 나는 학교를 졸업했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던 그때, 나는 약 이십 여 년간 지니고 있었던 학생이라는 신분을 벗어던진 홀가분함과 불안함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내가 누구인가를 고민하게 되는 중학생 무렵부터, 나는 나를 정의하기 위해 가장 간단하고도 유치한 방법을 사용했다. 권력자를 밀쳐 내가 밀려나는 만큼 나의 자아를 정립해갔다. 그게 선생님이었고 교수님이었다. 그들에게서 멀어지는 만큼 내가 뚜렷하게 느껴졌고, 만족감은 그 거리에 비례했다. 그런데 그 반작용을 위해 단단히 서있어야 할 벽이 단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뻔하게도 ‘나는 누구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버스 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앙상한 나뭇가지와 분주히 학교를 빠져나오는 학생들의 녹색 야상들을 바라보았다.   

  그즈음하여 호주에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2015년 인도 여행을 할 때 잠시 마주쳤던 사람이었다. 여행하다 두세 번 정도 더 마주친 인연이 신기해서 비록 함께 동행하지는 않았지만 가늘게나마 연이 닿아 있었다. 그는 오는 여름에 인도를 다시 갈 생각이라고 했다. 대충 계산해도 날짜는 맞지 않았다. 어차피 함께 갈 수는 없었지만, 분명 그의 말이 내 결심의 방아쇠가 된 건 맞다. 누군가 떠난다고 하면 맘이 크게 동요한다. 그 날로부터 무작정 인도 생각을 하며 살았다. 하지만 대체로 그렇듯 반드시 해야지 하면 되는 법이 없다. 인도 갈 돈을 모으겠다며 계획에도 없는 인턴생활을 시작했고, 막상 일을 시작하니 그만두는 게 쉽지 않았다.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을 것 같은 제안들이 종종 들어왔고, 미래를 위해 공부해야 할 것도 끝이 없어 보였다. 현업에 있다는 건 어쩌면 해류를 타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시기를 놓쳐 영영 바다를 표류하게 되는 난파선이 되지는 않을까, 그런 걱정을 하다 보니 어느새 결심 같은 건 잊혀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의 여름이 지났다.

2018. 8월 제이제이

  2018년 여름, 캐나다에서 돌아온 제이제이를 만났다. 3년 만이었다. 아그라행 기차 안에서, 혹은 안나푸르나 산을 오르며, 우리는 꿈이나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D와 나는 회사원이 되어 있었고, 제이제이는 대학 졸업을 위해 귀국했으며, R만이 여전히 무언가를 하지 않은 채로 살고 있었지만 그게 변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우리 모두에게 시간이 흐른다는 건 물리적인 일이었다.   


2018. 10월 결심

  언제부터 나에게 ‘퇴사’라는 선택지가 생겼을까. 퇴사한다고 해서 아무런 일도 안 생긴다는 사실은 누가 먼저 알아낸 걸까. 덕분에 우리 세대에겐 버티기 외에 몇 가지 선택지가 더 생겼다. 이건 어쩌면 로망의 세대 간 대물림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던 일들이 세대를 거치며 평범해져 가는 것. 그러니 현재 우리 청춘이 공유하고 있는 현시대적 로망들도 (포기하지 않는 한) 곧 평범의 범주에 들어올 것이다. (우리가 존버 해야 하는 이유다.)  어찌 됐든 각설하고, 생각해보면 내가 퇴사를 고려하게 된 건 수많은 퇴사 선례들에 숟가락을 얹은 것에 불과했다. 선대의 로망을 현실화시킨 젊은 선구자들의 무수한 노력에 감사하며, 비교적 쉽게 퇴사를 고려할 수 있었다. 물론 결심은 또 다른 문제였지만 이미 퇴사를 고려한 마당에 계기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내게는 10월의 어느 날이 이 아무래도 좋을 날이 되었다.  그 날로부터 몇 달 전, 그러니까 제이제이를 서울 종로구의 어느 맥주집에서 만난 후로 나는 4년 전 올랐던 안나푸르나 사진을 찾아보곤 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의 퇴사 의지와 히말라야는 전혀 별개의 일이었다. 말하자면 히말라야는 이뤄서는 안 되는 꿈과 같은 거였다. ‘언젠가’라는 말로 멀찍이 밀어놓은 꿈이 사라져 버리면 길을 달릴 이유가 없어져버리니까. 그러니 히말라야가 퇴사의 동기가 된다는 건 말이 안 됐다. 내가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던 ‘퇴사할 거예요.’의 진짜 뜻은 ‘일하기 싫어요.’가 아니라 ‘일하고 싶어요.’에 가까웠다.   

  그리고 어느 날 친한 동료 한 명이 권고사직을 받았다. 신제품 티저 촬영을 하고 늦게 복귀해서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하고 그 동료를 보냈다. 위로금을 챙겨줄 테니 당일 퇴사하는 게 어떻냐는 사측의 권고가 있었다고 했다. 그 이후로 동료들 사이에서는 ‘다음은 나야’라는 자조적 유행어가 생겼다.

2018. 12월 사직서

우리 동네는 골목길이 많다. 사실 서울 어디를 가도 골목길이 많다. 서울뿐일까, 세계 어느 곳을 가도 그럴 것이다. 따지고 보면 ‘집과 집 사이의 공간들’을 그냥 편하게 골목길이라고 부르는 것 아닌가. 그러니 내가 퇴근길에 ‘우리 동네 골목길의 끝에 산이 있구나’라고 생각했던 건, 정확히 집과 집 사이로 산이 보이는 것뿐이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나는 사직 의사를 밝혔다. 무려 인생의 첫 사직서였다. 지나고 보면 아주 작은 일들 뿐이다. 내가 스스로의 인생을 망칠 수 있다는 생각은 아주 오만한 생각이었다. 웬만해선 인생은 망쳐지지 않는다는 걸 점차로 깨닫게 되는 날들이 있다. 생각보다 나의 인생에 있어서 내가 가진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주체적으로 산다는 건 그래서 내게 어려운 일이다. 어떤 선택을 해도 내 인생의 궤도가 0.5도 정도 틀어질 뿐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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