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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탁월 Apr 14. 2023

등 돌리는 여인들

2022 MBC 라디오 PD 공채 합격 글

모름지기 휴일은 목욕 가방을 싸면서 시작해야 한다. 구멍이 숭숭 뚫린 플라스틱 가방에 샴푸와 린스를 넣는다. 초록 바탕에 검은 줄이 두 개 그어진 까끌한 타올 두 개, 바디 로션, 칫솔도 잊지 않고 챙긴다. 바나나맛 우유까지 살뜰하게 담으면 준비 끝이다. 내가 사는 서대문구 끝자락 홍제동은 조용한 동네다. 낮은 높이의 다가구 주택이 듬성 듬성 지어져 있고, 초여름이면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핀다. 그 골목 사이 오래된 목욕탕이 하나 있다. 일요일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슬리퍼를 끌고 털레털레 목욕을 하러 가는 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상 중 하나다.


목욕탕에 들어서면 물기를 머금은 향기가 코 끝에 묵직하게 달라붙는다. 얼굴에 황토색 팩을 붙인 아주머니, 한가롭게 TV를 보는 할머니들, 엄마 허벅지를 잡고 종종 걸음으로 뒤따라 가는 아이들은 모두 공평한 차림으로 목욕탕의 풍경을 이룬다. 제각기 다른 몸들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유롭게 휴식한다. 나는 이 평등한 세상에 자유를 느끼러 왔다. 어제의 나는 상사에게 깨지는 회사원이었고, 저번주의 나는 못난 딸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러 온 78번 열쇠의 주인일 뿐이다.


목욕탕의 몸들은 정직하다. 그렇기에 누구도 서로를 함부로 평가할 수 없다. 가장 날 것의 모습을 공유하는 자들의 의리다. 등이 굽거나, 피부가 벗겨졌거나, 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보글보글 볶았거나, 살이 두 겹으로 접히거나, 배에 길다란 상처가 있어도 그 누구도 서로의 몸에 대해 소리내어 평하지 않는다. 목욕탕의 여성들은 그저 오늘 홍제동 수산 시장에 고등어가 싸게 나왔다는 얘기나 두런두런 나누며 저녁 메뉴를 고민할 뿐이다.


등이 시뻘개질 때까지 열탕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자꾸 나를 쳐다본다. 눈짓으로 인사를 하니 한 마디 하신다.


밀어줘?

<등 돌리는 여인들>, 230414, 모조지에 목탄과 아크릴 ©2023. YEJI LEE All rights reserved


그 때부터 우리의 거래는 시작된다. 초록색 타올을 두 개 챙겼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목욕탕에는 모종의 약속이 있다. 누군가 내게 등을 맡기면, 나 역시도 그에게 등을 의탁한다. 교환의 미학이다. 이 곳은 자급자족 경제와는 거리가 먼, 수요자와 공급자가 시장을 통해 모종의 거래를 하는 교환 경제의 장이다. 상호간 합의하여 서로에게 등을 보여주는 순간 양 측에는 시원함이라는 이익이 발생하고, 세신에 드는 비용은 자동적으로 절약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목욕탕에는 하나의 예외 법칙이 존재한다. 교환 경제의 논리에 따라 등가 교환만을 허락했다면 두 사람은 이토록 깊은 우정을 나누지 못했을 터이다. 등을 밀린 나는 할머니의 등 앞에 구부정하게 선다. 조그맣고 쪼글쪼글한, 그러나 강단 있게 꼿꼿한 그녀의 등을 본다. 그녀와 나는 각자의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겉과 속이 동시에 시원해진다. 내 손짓이 위 아래로 빨라짐에 따라 우리의 목소리는 조금 더 커진다.


물질적 교환의 경제에서 ‘인간적인 것’의 교환을 가능케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한다. 각기 다른 몸에 대한 존중, 이웃을 향한 정이 그것이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인간애야말로 돈으로 평가되는 시대를 뛰어 넘는 유일한 자원이다. 대가 없이 사랑을 나눠주는 증여의 현장에서 개운해진 마음으로 바나나 우유 하나를 그녀에게 건넨다. 노란색 달콤함이 두 여자의 식도를 타고 시원하게 흘러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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