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은솔 Aug 15. 2023

출근길 지하철, 어깨를 빌려주는 순간

주말에 다니는 회사는 아홉 시까지 출근이지만, 지하철을 타고 한 시간쯤 가야 하는 거리이므로 집에서 일곱 시 반에는 출발해야 한다. 그러려면 일곱 시에는 일어나야 하는데 정말이지 적응이 되지 않는다. 매주 새롭게 피곤하다.


출근길 지하철에서는 주로 잠을 잔다.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때도 있지만 대개는 그럴 체력이 없다. 고개를 꾸벅꾸벅 흔들면서, 손에 든 휴대폰을 몇 번이나 떨어뜨리면서 목적지까지 실려 간다. 그러다 내릴 곳을 놓친 적도 여러 번이다.


얼마 전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모처럼 아침부터 명징한 정신으로 책을 읽으면서 지하철을 타고 가던 중이었다. 옆에는 평소의 나처럼 상모를 돌리며 있는 힘껏 졸고 있는 내 또래의 남자가 있었다. 나는 그의 안쓰러운 피곤함을 일별한 뒤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가 내 어깨에 기대 오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 몇 번은 기대자마자 눈을 뜨고는 자세를 바로잡았는데, 결국 몰려오는 잠을 이기지 못했는지 내 어깨에 깊숙이 얼굴을 기댔다.


당황하지는 않았다. 이미 예전에도 수 차례 겪어본 일이었기 때문이다. 내 어깨에 기대어 잠을 자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는 불편한 듯 몸을 털거나 그 사람을 깨우지 않는다. 그저 그가 편안히 잠을 잘 수 있도록 어깨에 힘을 빼고 팔의 움직임을 최소화한다.


피곤한 출근길에 내가 늘 그랬던 것처럼, 그는 흔들리는 지하철 안에서도 잘 잤다.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그의 숨결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는 내 왼쪽 어깨에 기댄 채 자고 있었다. 오른손으로는 책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왼손으로 책장을 넘겨야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그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이상한 광경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누구인지도 모를 사람에게 어깨를 빌려줘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어깨에 기대 오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는 늘 기꺼이 어깨를 빌려주었다. 왠지 그러고 싶었다.


지하철에서 자는 쪽잠이 꽤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고도 잔 것 같지 않은 기분으로 허겁지겁 깨어나 목적지에 내리게 된다. 이리저리 흔들리던 머리 때문에 목과 어깨는 뻐근하고 개운하게 정신이 들지도 않는다. 지하철에서 자는 것은 그 자체로 피곤한 행위다.


그래서 내가 어깨를 빌려주는 것으로 그 사람이 잠깐이라도 깊이 잠들 수 있다면, 그건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힘든 일도 아니니까. 앞으로도 나는 고단한 사람들에게 계속 어깨를 빌려주고 싶다. 물론 그가 필요로 할 때 말이다.


한편 전철은 청담역을 지나 뚝섬유원지로 향해 가면서 청담대교 위를 건너가고 있었고, 나는 오래간만에 보는 한강을 낯설게 쳐다보았다. 아침의 한강은 얼마나 눈부시게 아름다운지. 희붐한 햇빛이 강 전체에 반짝이는 물비늘을 드리우는데 그래서 아침의 한강은 흡사 거대한 물고기 같다.


늘 지나는 구간이지만, 평소에는 잠을 자느라 정신이 없어서 한강을 거의 보지 못한다. 한강은 볼 때마다 그것을 처음 마주하던 순간의 감동 속으로 나를 끊임없이 데려간다. 검은 어둠뿐이던 길고 긴 터널을 지나 눈앞에 한강이 펼쳐질 때, 몇 사람이 고개를 들어 가만히 바깥을 바라보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좋다. 그들의 표정은 모두 똑같다. 아주 새삼스럽다는 듯이. 마치 한강이 거기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안 사람처럼.


다시 시선을 돌려 옆에서 자고 있는 남자를 바라본다. 내릴 곳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누군가가 처음 어깨에 기대어 오는 순간보다도 바로 이 순간에 나는 더 고민하고 머뭇거리게 되는데, 깨우지 않고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방법을 아직 모르는 까닭이다.


깨워서 '저 이제 내려요' 하고 내린 적도 있었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다. 그렇게 하면 잠자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당황하거나 미안해했다. 그런 반응을 보고 싶지는 않다.


가능한 그의 머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면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내가 일어서자마자 그의 몸은 중심을 잃고 크게 흔들거린다. 그러나 이미 깊게 잠든 것인지 깨어나지는 않는다. 휴대폰까지 떨어뜨리면서 자는 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바라본 뒤,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집어서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미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잠의 세계로 떠나버린 그의 모습은 평소 출근길의 내 모습을 보는 듯하다. 그가 그렇게 푹 자고도 목적지를 놓치지 않기를 바라며 전차 바깥으로 발을 내딛는다.


모르는 누군가에게 어깨를 빌려준 날에는 탁탁 펴서 널어놓은 흰색 이불보처럼 깨끗하고 단정한 마음이 든다. 그렇게 될 기회를 나는 언제나 기다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