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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은솔 Dec 11. 2024

내가 샤브샤브를 좋아하는 이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샤브샤브다. 특별한 추억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 우리 집은 외식을 거의 하지 않았다. 반찬은 늘 계란 후라이, 김치, 싸구려 햄이 전부였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샤브샤브라는 음식이 세상에 존재하는 줄도 모른 채 살았다.


샤브샤브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초등학교 졸업식 때였다. 모두가 꽃다발을 품에 안고 환하게 웃으며 가족과 사진을 찍고 있는데, 나는 운동장 한구석에 홀로 앉아 있었다.


아무도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한 데다 우리 학교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셨다. 아빠는, 그냥 안 올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오지 않은 가족을 기다리는 것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내가 앉아 있었던 곳은 일명 '등나무 교실'이라고 부르던 계단형 데크였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니 운동장의 그 모든 소란이 멀고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마치 TV를 보고 있는 듯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람들이 하나 둘 빠져나갔고 소음도 점차 줄어들었다. 나는 운동장에 아무도 남지 않게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떠날 작정이었다. 그런데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부모님 기다리는 거니?"

"아뇨."

"혼자니?"

"네."


아주머니 곁에는 5학년 때는 친했지만 6학년이 되고 나서 멀어진 한때의 단짝이 있었다. 우리는 어색하게 눈인사를 나눴다. 아주머니는 밥 먹으러 함께 가자고 했다. 거절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실 그런 호의를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아주머니를 따라갔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아주머니는 내게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자신의 호기심을 채우지 않았다. 여느 어른들의 태도와는 다른, 아주머니의 묵묵함이 생경했다. 친구도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다.


아주머니가 향한 곳은 채선당이었다. 내부는 무척 넓었고, 중앙에 각종 채소들이 뷔페 식으로 놓여 있었다. 사실 난 그때 뷔페라는 단어도 몰랐다. 13년 인생 전체를 통틀어 그런 근사한 식당에 가본 건 처음이었다.


샤브샤브는 낯설고 신기한 음식이었다. 전골 요리 자체를 그때 처음으로 먹어봤다. 고기는 종잇장처럼 얇게 썰려 흰 접시 위에 가지런히 담겨 나왔고, 그걸 보글보글 끓는 육수 속에 집어넣으면 몇 초 지나지 않아 갈색으로 익었다. 고기와 야채에 소스를 듬뿍 찍어 입안에 넣으면 말 그대로 사르르 녹는 듯했다.


식사 예절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건 아직까지도 나를 괴롭히는 오랜 콤플렉스다. 그때는 어렸으니 아마 더 지저분하게 먹었을 거고, 처음 접하는 신기하고 맛있는 음식 앞에서 자제심을 발휘하기란 어려웠을 거다. 내가 정신 없이 샤브샤브를 먹는 걸 보며 아주머니는 말씀하셨다.


"고기 더 먹고 싶으면 얼마든지 시켜줄 테니까, 많이 먹어."


그리고 또 아무것도 말씀하지도, 묻지도 않으셨다. 그날 먹었던 샤브샤브의 맛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나를 동정하지 않고 그저 따뜻한 음식으로 배를 채워주셨던,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 아주머니의 선의를 영원히 기억하며 살아갈 듯하다.


이건 나에게 분명한 '추억'이지만 누군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 아파할 것이다. 추억이라는 단어는 보통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기억에만 쓰인다. 외식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던 아이가, 졸업식 날에도 아무도 와주질 않아서 누군지도 모르는 어른에게 밥을 얻어 먹었다는 이야기는 별로 긍정적이거나 아름답지 않다. 하지만 난 그 기억을 추억이라 부르고 싶다. 나에게는 정말로 소중한 추억이다.


남편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당장 샤브샤브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샤브샤브를 먹으며, 남편이 될 수도 있었던 전 남자친구에 관한 생각을 했다.


그에게도 이 얘기를 했었고 그 또한 당장 샤브샤브를 먹으러 가자는 반응을 보였다. 공교롭게도 그와 동거하던 집 근처에는 고급 샤브샤브집이 있었다. 당연히 채선당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맛있었다. 내가 그 샤브샤브 맛에 반해서 외식할 때마다 거기만 가자고 하니, 그는 지겨워하면서도 일단 몇 달쯤 버텨주었다. 외식을 하자는 말에 평소처럼 샤브샤브를 외친 어느 날의 나에게 그는 결국 이렇게 말했다. 은솔아, 이제 샤브샤브 그만 먹자. 나 힘들다.


어쨌든 나는 여전히 샤브샤브를 좋아한다. 지금의 남편은 샤브샤브 먹으러 가자는 제안을 과연 몇 번이나 견뎌줄지 궁금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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