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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에스더 Jul 02. 2022

엄마 나 버리지 마요, 내가 잘할게요

버림받는 것이 두려워서 화도 내지 못했던 나에게





엄마 이거 사줘요.





둘째 아이를 데리고 마트에 갔다. 아이는 좋아하는 얼초를 하나 골랐다. 계산하고 나오는데 뽀로로 물총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보더니 바로 사달라고 했다.     




“너 얼초 샀잖아. 오늘은 물총 사지 않는 거야.”

“싫어! 이거 사줘요!!!!!”




아이는 격해지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멈춰서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최대한 좋게 설득하려고 애썼다. 이미 내 말은 아이의 귀와 마음에 닿지 않았다. 마트를 나오기 전부터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아이의 고집에 질 수 없지. 애의 손을 잡아서 끌고 나오다시피 했다. 이미 화가 난 아이의 몸에는 과한 기운도 더해졌다. 버티려는 힘을 억누르고 데리고 나오는 게 힘겨웠다. 







길에서 걸어오는 내내 아이는 크게 울었다. 사람들이 우리를 힐끔 쳐다보며 지나갔다. 


“아가 왜 울고 지나가노. 야아~ 울지 마라.”


 어떤 할머니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한마디 던지고 갔다. 나에게는 왜 애를 길에서 울리냐는 질타처럼 들렸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아이의 손을 잡고 묵묵히 걸어갔다. 갑자기 애가 멈췄다. 내가 끌고 가도 완강히 버티며 계속 울었다. 저 입을 때려서라도 닫아버리고 싶었다.


 여름이 왜 이리 빨리 온 것일까. 갑자기 더워진 6월의 날씨. 오는 동안 이마와 등에서 땀이 줄줄 흐른다. 그럴수록 내 짜증의 열기는 하늘로 올라가고 있다. 아이가 움직이지 않고 서서 버티자 나는 잡았던 손을 놓아버렸다. 그리고는 혼자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으앙, 엄마!!!!!!!”




애는 더 크게 울었다. 그 자리에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나는 울음소리를 뒤로 하고 앞만 보고 갔다. 다시는 마트에 애와 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뿐이었다. 아이는 몇 분을 그 자리에서 울면서 엄마가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어떤 남자분이 나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혹시 저 아이 엄마세요?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더니 뒤에서 초등학교 6학년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우리 아이를 데리고 왔다. 아이는 계속 울면서 오더니 말했다.


“엄마 안아주세요.”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던 오후, 나는 아이를 안으며 마음으로 울었다. 최근 들어 보여주는 엄마의 설득이 전혀 먹히지 않는 행동. 그로 인해 이미 바닥에서 지하로 뚫고 내려간 육아 자신감, 반면에 우리 아이처럼 떼쓰지 못하고 너무 빨리 커버린 내 어린 시절, 엄마에게 버림받았다는 두려운 마음을 아이에게 준 거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서 힘들었다. 










나는 아주 어린 시절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친정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전까지 징징거리며 다녔다고 했다. 그런 아이가 예뻐 보이지 않았으리라. 울고 떼쓰는 아이에게 따스하고 다정함이 아닌 차가움과 냉정함으로 키우셨다. 


 그것을 온몸으로 느꼈던 나는 엄마의 기운이 냉랭하면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를 화나게 만들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점점 엄마에게 짜증을 내지 않았다.


 우리 가정 형편이 어렵다는 것도 금세 알았다. 뭘 사달라고 말하지 않는 아이가 되었다. 너무 일찍 철이 들었다. 주변 어른들은 칭찬했다. 어쩜 이렇게 어른스럽냐며. 엄마는 그것을 기쁘고 자랑스럽게 받아들이셨다.

 

 나는 점차 감정을 숨기는 게 익숙해질 따름이었다. 그러면서 엄마의 화, 속상함을 받아주는 감정의 하수구가 되었다. 엄마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였으니까. 사실은 버림받을까 두려워서 큰 소리로 화나 짜증도 내지 못한 거였다.




어른이 되어서 내가 마음을 주었던 사람들이 나에게 차가운 태도를 보이면 힘들었다. 곧바로 ‘이러다 버림받으면 어떡해’로 연결되었다. 그래서 그 사람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과하게 애썼다. 나는 몸만 컸을 뿐 여전히 누군가에게 버림받을 것이 두려워 떨고 있는 아이였다. 


 이런 내 연약함을 아이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행동은 다르게 나왔다. 애가 떼를 쓰면서 강하게 주장하면 나는 너를 버리겠다는 듯한 행동으로 겁을 주고 있었다. 어떤 말도 해주지 않은 채 아이를 놔두고 나 혼자 가버리는 걸로 표현했다.


 이러면 내가 두려워했던 것을 아이도 온몸으로 받으며 크는 거 아닐까. 정작 자신의 화나고 짜증 나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숨기고 다른 사람의 기분에 맞추며 살려고 할 테니까. 내가 아이에게 바라는 건 그게 아니다. 누군가에게 버림받을까 두려워서 너무 빨리 철드는 건 좋지 않다. 






 아이가 거절받았을 때 격해지는 것과 내가 화났을 때 건강하게 표현하는 것, 두 가지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기로 했다. 



이번 육아에서 내가 성장하기 위한 삶의 과제였다.



 아이가 거절받았을 때 격해지는 부분에서는 <부모와 아이 사이> 책에 나오는 방법을 적용했다. 거기에서 말하는 건 아이가 갖고 싶은 소망을 알아주라는 조언이었다. 현실에서 만족시켜 줄 수 없어도 상상에서는 허락해주라는 거였다. 그래서 물건을 사고 싶지만, 아이에게 거절해야 할 때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이거 정말 사고 싶겠다. 물총놀이하면 되게 재미있을 테니까. 우리 지민이랑 물총으로 같이 놀면 진짜 진짜 좋겠다."



그런 뒤에



“그런데 이건 살 수 없어. 물총 살 돈이 없어.”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신기하게 아이가 폭발하는 정도까지 가지 않았다. 애가 듣고 싶은 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엄마의 따뜻하고 다정한 이해의 말이었다. 비록 그걸 사주지 않을지라도, 그전처럼 바로 거절받는 기분이 들지 않게 해주는 쿠션이었다. 


 그건 내가 자라면서 엄마에게 듣기를 바랐던 말이었다. 들어본 적 없어서 어떻게 말해줘야 좋을지 몰랐다. 거기에 더해서 아이에게 내가 화나는 것, 따로 거리를 두게 되는 것도 설명해주었다.




엄마가 너를 혼자 둔 건 자꾸 소리치며 우는 너를 보고 내가 너무 화나서 그랬어. 네 옆에서 붙어있다 보면 더 화가 나니까. 혼자 두었다고 해서 너를 버리는 게 아니야. 엄마는 절대 너를 버리지 않아.











사람은 누구 앞에서든지 다른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그런데도 누군가가 두렵다는 건 나를 다스리는 힘을 타인에게 맡겨버렸기 때문이야.



 헤르만 헤세가 쓴 <데미안>에서 데미안이 두려움에 대해서 말해주는 글귀다. 나는 타인에게 버림받을 것이 두려웠다. 화나고 짜증 나도 상대방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 덕분에 조금씩 바뀔 수 있었다. 비로소 “나 화났어.”를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엄마가 먼저 느낀 다양한 감정을 아이에게 말로 표현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격해졌을 때 서로 거리를 두는 이유를 정확히 설명주는 게 좋다. 그래야 아이 역시 분노, 격해지는 감정을 말하는 것으로 연습할 수 있다. 그러면 버림받고 싶지 않아서 타인의 감정에 맞추고 받아주느라 내 감정을 감추는 행동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내 모든 감정을 수용하고 느낌을 말로 표현하는 것, 버림받을 것이 두려워서 떨고 있는 내 마음을 따스하게 감싸 안아주는 것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다.  나는 오늘도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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