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립 보행을 확인하다. 9

산골 예술제.

by 아무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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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걷는다. 그러나 매일 다른 길을 걷는다. 그리고 매번 다른 사람들을 만난다. 그 사람들에게는 비슷하고도 전혀 다른 선의와 친절을 경험하고, 감동한다. 지금 까지 나는 삶의 긍정들을 무작정 믿고 살아왔다. 하지만 그것은 교만함이 꾸며낸 그럴듯한 이론에 불과했다. 걷기를 시작한 첫날부터 그 사실은 조금씩 명확해지고 있으며 오늘도 그러한 날이 될 것이다.



구천동을 빠져나오며 마을회관 옆에 수도가 있어 빨래를 하려 했지만 물이 나오지 않는다. 비에 젖은 옷과 양말에서는 꿉꿉한 냄새가 난다. 옆집에서는 남자분이 작은 구멍이 촘촘히 나있는 플라스틱 상자를 칫솔로 닦고 있다. 길과 가까운 마당 한쪽에 수도가 있다. 물을 쓸 수 있는지 부탁을 하자 반들한 윤이나는 플라스틱 대야도 내어 준다. 그리고 다시 아무 말 없이 상자를 열심히 닦는다.


상자 바닥의 수없이 많은 작은 틈새를 하나하나 꼼꼼하게 닦는 모습을 보고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무슨 용도로 쓰이는데 저리도 정성껏 닦는 걸까. 물어볼 수가 없었다. 부담스럽지 않은 편하고 온화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뭘 그렇게 정성껏 닦으세요?' 지나가듯 물어볼 수도 있는데. 입은 떨어지지 않는다. 내게 말을 먼저 붙일 법도 한데. 나는 없어져 버렸다. 아무튼 그랬다.


나도 빨래를 열심히 했다. 도서관에 가면 공부가 잘 되듯이 집중하는 분위기에 나도 빠져들었다. 양말의 물기를 힘껏 짜내고 떠날 채비를 하는데 빨래가 젖어서 어떻게 하냐고 묻는다. 나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어 기뻤다. 배낭에 주렁주렁 걸어 놓고 걷다 보면 마른다고 대답했다. 말하는 내 얼굴엔 화색이 돌았지만 경박하게 보일까 봐 애써 감추며 덤덤한 척 말했다. 분위기에 맞게.


걸으면서 많은 생각들을 하는지 다시 묻는다. "오만가지 생각을 하죠... 어느 땐 아무 생각도 없어지구요..." 뭔가 더 말을 더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공부 많이 하세요." 하며 집안으로 들어간다. 이어서 투명 비닐에 넣은 옥수수 두 자루와 포도주스 한 병을 준다.


여름의 가장 가운데에서 쏟아내는 빛과 열기는 이 조용하고 나지막한 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 잠시 멈추고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한다. 성함이라도 기억하고 싶었지만 직접 물어볼 수는 없었다. 문패를 보았다. 두 개의 이름이 나란히 쓰여있다. 하나는 부인의 이름이라 짐작했다. '백xx' 존함이 맞는지 확인했다. 건강하시라 인사를 하고 기도해 드리겠다 말했다. 그 말은 지켜졌다. 지금 이 순간도 나는 기도로 글을 쓴다. '건강하시길 소망합니다.'


걷는 동안 그분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그분의 분위기는 분명 특별했다. '공부 많이 하세요.' 계속해서 소리가 귓전에서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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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다. 새로 난 넓은 길과 산을 넘는 옛길이 있다. 옛길을 선택했다. 그런데 아무리 걸어도 영동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보이지 않는다. 이정표는 무안과 가까워지는 것을 알릴 뿐이다. 불안해 몇 번 길을 물었지만 모두들 똑같은 방향만 알려준다. 발에서는 불이 난다. 어찌나 덥고 아스팔트는 뜨거운지 이상태로 가면 저녁에는 발을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미디엄으로.


쉬었다 다시 걸은 지 십 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저만큼 보이는 노점이 강한 중력으로 나를 잡아당긴다. 모든 게 한계에 도달했음을 알겠다. 눈까지 흐려지며 초점을 잃었다. 아주머니가 옥수수와 포도를 팔고 있다. 예약이라도 한 것처럼 엉덩이를 먼저 붙이며 잠깐 쉬었다 가겠다고 말했다. 잠시 정신을 차리고 머뭇거리다 길을 물었다. 이미 지나왔다고 한다. 아~! 절망적일 때 생기는 큰 구멍이 가슴을 허전하게 한다. 다시 돌아가는 것이 더 빠를 거라고 한다. 다시 한번 아~!


더 멀고 시간이 걸려도 가던 방향으로 가고싶다. 지나온 길을 되돌아 가는 것보다는 쉬울 것 같다는 마음이 든다. 쉽 다기보다는 되돌아 가는 것이 싫다. 왜일까. 물체만 관성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의 정신 혹은 마음도 관성이 있는데 이게 물리적인 관성보다 더 고질적이다. 좋게 말해 고집이라고 볼 수 있고 나쁘게 말해 판단력이 부족한 것이다. 확증편향도 비슷한 증세다. 되돌아 간다는 것은 그동안 자신이 믿어 왔던 기준이 되는 가치들을 부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대부분 나이를 먹게 될수록 이러한 증상이 심화되고 굳어진다. 제대로 길을 찾지 못한 내가 스스로가 못마땅하다.


걸어서 25분 정도 걸린다고 한다. 하지만 설명을 들어보니 3km 이상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십 분도 걷기 힘든데 말이다. 혼란스러워하는 나에게 아주머니는 종이에 약도까지 그려서 접어준다. 그리고 팔려고 올려놓은 옥수수 한 봉지를 준다. "그거 파는 거잖아요." 재차 가면서 먹으라고 한다. "감사합니다." 말이 끝나자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준다. 누군가에게서 받았는데 자신은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는다며 내게 준다.


그때는 생각지 못했지만 안 먹는 게 아니었을 것이다. 분명 아껴 두었던 것이다. 감동에 말문은 막혔다. 나같은 인간은 버리려 놓아둔 것도 남에게 줄 때는 그 생색이 하늘을 찌른다. 결국 상대방은 내가 건낸 호의를 쓰레기통에 쳐박아 버리곤 한다. 허리만 숙여 인사를 하고 발을 떼려는데 포도 한 송이를 더 준다.


여러분께서는 내가 어떠한 표현으로도 이 감정을 전달하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단지,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고마움의 표현에 대한 고민의 시간이 많았다는 것을 알아 주시기 바란다. 꽤 많은 시간을 고민했다는 것을. 세상은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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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이굽이 넘고 넘어 자계 마을에 도착했다. '산골마을 예술제'라는 행사 현수막과 포스터가 보인다. 폐교를 이용해 몇 년째 예술제를 열고 있었다. 그 일정 중 오늘이 두 번째 날이다. 운도 좋지. 오늘의 프로그램은 무엇이 있을까 살피는데 눈에 띄는 것이 있다. 내일 저녁 상연 예정인 연극이 내가 인상 깊게 관람했던 작품이었다. 또 배우 중에는 나에게 도움을 준 친한 사람도 있었다. 반가운 우연이다.


자계리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마을의 중심에는 산에서 내려오는 개울물이 있는데 물 옆의 버드나무는 신령한 느낌을 준다. 천년은 되었을 법한 나무들은 벼락을 맞은 흉터를 명예처럼 지니고 있다. 생명을 다한 고목의 밑둥에서 새로운 싹을 틔워 앞으로의 천년을 기약한다.


조그만 빨래터도 보인다. 빨래터에는 오래된 이야기들이 물과 함께 뒤섞여 흘러가고 있다. 늙은 나무들은 그 많은 이야기들을 모두 들었을 것이다. 바닥은 시멘트로 반듯하게 발라놓았다. 그곳에 텐트를 설치하고 싶어 진다. 개울물과는 한걸음 정도의 거리다. 밤새 물소리와 뒤섞인 오래된 이야기를 저 할아버지 버드나무와 함께 나누면서 막걸리 한잔 마신다면 참 좋겠다. 마을 평상에서 잠시 쉬며 동네 어른들과 잡담을 늘어놓았다.


자계리에 들어와 처음 만난 사람이 부녀회장 같아 보인다.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을 보이는 것 같았는데 행사장에서 만나니 국수 한 그릇 팔고 파전은 공짜로 준다. 그리고 다시 국수 한 그릇은 후식으로 서비스. 저녁은 예술제를 관람하며 사람들과 어울렸다. 부녀회에서 준비한 음식과 막걸리와 맥주 한잔까지 입가심으로... 조오타~!




행사 전에는 공연장소 그러니까 폐교의 입구에서 한 남자가 책을 소개하고 있었다. 몇 명의 사람들이 모여 일장 연설을 듣고 있었다. 남자는 작고 마른 편인데 매우 자신감 있고 기대에 찬 목소리로 '내 고향 xx도'라는 제목의 책에 대한 설명을 하며 열을 올린다.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대단한 책이라는 것이다. 자기의 인생을 담아낸 책이라며 자랑을 하는데 말 그대로라면 차기 노벨문학상 수상까지는 아니어도 후보에는 오르고도 남는다.


책을 내 앞으로 내민다. 얼떨결에 책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만원이라고 한다. 만... 원... 나는 자신의 책을 홍보하며 원하는 사람에게는 무료로 나누어 주고 예술제 후원 성금을 모금하는 줄 알았다. 앞에는 모금함이 있었으니까. 내 여행의 하루 경비는 대략 이만 원 정도다. 교통과 숙박비용이 필요 없으니 먹는 것으로만은 충분하다. 하루 한 끼 정도는 라면이나 준비한 비상식량을 먹기 때문에 전혀 부족하지가 않다.


그러니 내가 받아 든 책의 무게가 어떠했는지는 여러분도 짐작할 수 있다. 분위기라는 게 있다. 눈치가 없으면 분위기를 깬다. 시간이 느리게 간다. 책을 내려놓기에는 이미 주변의 모든 시선이 시커멓게 탄 이방인의 얼굴에 모아 진 상태다. 딜레마? 아니 진퇴양난. 주위의 시선을 극도로 의식하는 소심한 나는 여기서 쭈글 한 모습을 보일 수 없다는 판단을 순간적으로 한다.


여러분! 다시는 이런 여유로운 미소를 보실 수 없을 겁니다. 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만... 원... 을 부드럽게 책 대신 내민다. 아주 가증스럽게. 아~! 만. 원. 책 보다 이천배는 가볍고 삼천배는 더 소중한 그 만원을. 나는 낚... 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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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공연을 관람하고 후한 음식도 대접을 받았으니 몇배의 보상이 이루어진 셈이다. 그리고 노벨상 후보작도 있지 않은가. 배낭은 얼마나 더 무거울지. 풍물패 공연은 유명한 사람의 사물놀이 뺨을 네 번 때릴 정도로 멋졌다. 정말이다. 부인과 함께 공연을 보러 온 남자분이 맥주캔을 하나 건네준다. 여기서는 누구나 구면이다. 처음 보는 사람도 그처럼 친근하다. 경계심을 없애고 마음을 열게 하는 것은 바로 자연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멋진 밤이다.






사람이 길.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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