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는 곳이 길이다.
4시. 죽산 도착. 조금 이른 시간. 조금 더 걷기로 한다.
길은 오후의 햇살이 너무 성글거나 조밀하지 않은 거름망을 통해 걸러져 비대칭의 황금비율로 흩뿌려져 있다. 지구 최고의 영장류가 최고의 지적 발현을 통해 발견한 완전한 형태. 동그라미. 동그라미는 수많은 물리적 도구를 탄생시켰고 그중 하나는 바퀴가 되었다. 생존과 생활의 필요에 의해 이동의 수단으로 발전한 바퀴가 지금은 바퀴의 질이, 기술과 미학이 동원된 바퀴의 굴러감이 삶의 질로 승화되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바퀴를 버리고 스스로 직립 인임을 확인하며 근육들의 본래 사용처에 맞는 행위를 확인하는 것은 의무에 준한다. 이러한 의무에 몸을 맡기고 의미를 찾아내고 짧은 반복의 움직임에 몰두하게 하는 것은 길이 있기 때문이다.
도로가 아닌 길은 사람들과 그 삶에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사람의 발이 지나갔고 사람의 손과 그 손으로 다루어진 도구와 시간의 흔적이 있어 올라탄 바퀴를 버리게 하고 마침내 발을 멈추게 한다.
'길... 길이다!' 멈추어 서서 입술을 닫은 채 혀로 되뇐다. 잠시 동안 가만히 서있는다. 멀리 있던 시선은 지면을 훑어가며 발밑까지 도달한다. 의식적이지만 수동적으로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본다. 숨을 느리고 크게 들이마신다. 눈을 감는다. 눈으로 받아들였던 감각들을 후각으로 치환한다. 천천히 내쉰다. 다시 한번... 눈을 뜬다. 다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다.
어떠한 무게나 불편함도 느낄 수 없다. 발은 공중에 떠있고 나는 더 이상 걸을 수 없다. 더 이상 움직임은 없으며 모든 걸음은 여기서 끝났다. 걸음의 최종 도착은 길 위가 된다.
이제는 움직일 때다. 무언가 전혀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듯이 움직임의 새로운 재활이 시작되는 듯 비장한 각오로 오른발을 떼어 놓는다. 바그작... 소리의 파장은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태초의 경련을 주파수로 재현한다.
흙이 밟히는 소리를 듣고 그 여운과 소리가 흩어질 즈음.. 왼발을 다시 떼어 딛는다. 걸음을 나아갈 때마다 깊은 호흡과 함께 흙과 나무와 풀과 빛과 그늘과 바람이, 냄새와 색채로 감각화되고, 그 알갱이들이 습기처럼 공간을 메꾸고 나의 느린 움직임과는 다르게 격렬한 플라즈마의 운동으로 환원된다. 그 격한 짜릿함이 다시 내 걸음을 멈추게 한다.
마른땅, 조금 덜 마른땅, 그보다 더 습기가 많은 길가의 그늘진 흙. 포삭한 곰팡내를 풍기는 이끼와 아직 마르지 않은 이슬의 무게로 겸손하게 처진 풀잎들, 크고 작은 나무와 주변의 알 수 없는 향기의 꽃들. 그것들이 내뿜는 공중의 향기. 그 향기를 부드럽고 날카로운 오후의 빛이 단 한 번의 칼질로 수천 개의 조각을 내며 공간을 팽창시킨다.
생명! 생명이다.
생명의 진동은 깊은숨을 통해 느끼는 격렬한 육체의 절정을 넘어선다. 혼이 고양의 단계에 오르는 기회의 문에 다가서게 한다. 첫 멈춤의 격한 발작은 새로운 그 무엇을 체험한 감각의 놀라움으로 나를 흥분하게 했지만 그 흥분은 모든 것을 느리게 했다. 느려진 몸은 더불어 느려진 마음을 뇌의 활동으로부터 분리해 낸다. 분리된 마음은 확실한 격리를 통해 육체 밖으로 해방된다. 독립한 마음은 육체를 통하던, 눈과 귀와 코와 입과 살갗을 통해 느끼던 기쁨의 원인이 된다. 하지만 기쁨의 원인이 되었다는 기쁨에 머물지 않고 그것들과도 다시 결별하며 더욱 깊은 곳에 도달한다. 멈춤.
나비.
감자꽃에서 날아온 배추흰나비는 꽃잎인지 나비인지 알 수가 없다. 장자는 꿈에서 나비를 보았지만 나는 나비를 현실에서 본다. 현실의 나비가 나를 꿈으로 이끌어 간다. 나비를 보는 나는 지금 나임을 자각하지만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가 그저 분별할 수 없을 뿐이다. 나는 그저 걷기를 멈추었을 뿐이다.
신발을 벗어 털었다. 몇 개의 굵은 모래알이 떨어진다. 걸을 때 뒤꿈치에서 튀어 오르던 모래알들 중 몇몇은 운이 좋게도? 신발 속으로 들어온다. 어디서부터 함께 왔는지는 모르겠다. 작별인사를 했다. 그들에게는 새로운 곳이다. 새로운 곳에 모래알들을 남겨둔다. 내 걸음이 개입하게 된 그들의 운명이다.
양말에 엄지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생겨났다. 어쩌면 질식의 위기에 나는 나의 공간을, 내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걸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어 작은 공간을 만들었을 수도 있다.
'엄마네 식당'에서 치킨과 피자를 나누어 주셨다.
주변에 술에 취한 중년의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인다.
일찍 잠들기는 틀렸다.
혹시 불륜?
에라이! 생각하고는....
사랑이리라...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