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립 보행을 확인하다. 16

17번 국도. 마중.

by 아무개



9시가 넘어서 잠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침대보는 가벼울 수 없는 몸뚱아리와 절대로 헤어질 수 없다며 허리를 두 팔로 감싸 안고 침대 위에 나를 눕혀보려고 애를 쓴다. 그것은 누구든 잠자리로 유혹할 만큼 스스로 에로틱하다고 생각한다. 진한 향. 바닥에 널부러진 한쪽은 너덜한 발의 가죽들을 경멸하며 바들 떨고 있다. 하얗게.


락스의 향. 탈색된 하얀색. 밤새 절여진 내 피부는 탈색은 어림도 없지만 어느새 모공들은 락스가 사망하며 기증한 모든 장기를 이식받아 끊임없이 백색의 페로몬을 폭폭 뿜어낸다. 그제야 나는 하얀색의 그 침구류들이 나와 동종인 것을 깨달았다. 탈색된 동종들. 나는 앞으로 5년 동안 흰색을 싫어할 것이다. 싫어한다. 싫어했다. 싫다.


늦잠과 흘러내리는 수면의 여분이 모두 이 빌어먹을 모텔의 모든 것 때문이라고, 쿠션과 침대보와 그것들의 친인척들이 숨을 쉴 때마다 내뿜는 백색의 페로몬 향이, 내 안의 곰팡이는 물론 삶의 원동력을 부추기는 욕망의 바이러스까지 몽땅 살해해버렸기 때문이라고, 무기력에 따르는 짜증을 하루 시작의 총알받이로 앞세운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낸다. 수건을 집어던지고 발로 짓밟는다. 수건은 흰색이었다. 하얗다. 싫다.


정리되지 않은 무엇이 컵 안의 이끼처럼 낯설고 불쾌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하루에 세 번씩 바라보고, 세 번씩 놀라고, 세 번씩 혐오하는 컵이다. 그래서 낯설지 않다. 매번 낯설지 않은 것에 세 번씩 놀란다고? 그런 내가 낯설다. 혐오의 컵을 대하는 나를 오늘 처음 만났기 때문인가? 그럼. 반갑게 악수.






태풍을 핑계 삼아 어둑한 방으로 피해 들어온 것이, 굴복당한 불쾌함이 오늘 아침의 모든 상황을 비극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야수를 동경하고 문명과는 반대로 지구가 거대한 울트라 슈퍼 컴퓨터로 변하더라도 나는 오만 년 전의 원시 야성을 유전자 단백질에 더욱 튼튼하게 매달아 고정시킬 것이라 생각했다. 그랬었다.


적당한 긴장을 유지했어야 했다. 하룻밤 사이에 정신 줄을 빨랫줄에 신발과 함께 빨아 널어놓았던 것이다. 안락함은 삶이라는 무대 위의 동선을 줄이기 마련이다. 화술도 부족한 배우에게 무리하게 주어진 많은 대사와 동선 없는 독백은 보는 관객들을 지루하게 만들어 작품을 증오하게 만든다. 긴장감이 없으니까. 그래서 적당한 긴장을 요구하는 것이다.


적당한... 그게 얼만큼이지? 적당한 건 그냥 적당한 것이다. 무게나 부피의 계량 단위가 아니라 모든 것의 적당 함이다. 나에게 적당한 것이 누구에게는 과하거나 부족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많은 사람들의 극히 주관적인 적당함들이 많은 사람들의 적당한 시간을 거치고 거치면서 타협을 이루어 냈으며 마침내 식품의약품 안전처와 국토교통부, 교육부, 기획재정부와 통일부의 승인과 함께 국회가 최종적으로 부결을 시킴으로써 적당함은 객관화되었다. 단군이래 국회가 4353년 만에 적당히 잘한 일이다.


만약 국회에서 가결이 되었다면 또다시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적당함'은 샴 컴파니에서 독점 생산하고 채널 b는 적당함과 전속 계약을 했을 것이다. 또한 떡 검사 비용으로 수조 원을 지급하고 밤에만 대통령이 된다는 전설의 신사들은 계속해서 적당한 연예인들을 적당한 룸으로 불러들여 적당히 은밀한 범죄를 저지를 것이다.


그들은 적당한 승용차와 적당한 호텔과 적당한 식당과 적당한 골프장의 회원권과 적당한 해외여행을 누리며, 적당한 부부나 부모로서 적당한 자식을 낳고 적당한 비리와 적당한 불법을 저지르고 적당한 범죄자로 그러나 그 죄값은 적당히 넘겨가며 적당히 오래 살아갈 것이다. 끔찍하다. 지금까지 국회는 정말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왔었다.



만약 그랬다면 일반 사람들은 적당한 것을 살아서 만져보기는 커녕 그림자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국회의 부결로 인해 적당은 우리 일반의 보편 기준으로 계속 정착할 수 있었다. 측정이나 계량이 아닌 삶과 생활 일반에 대한 사람들 각자의 경험적 직관이 '적당한' 선에서 보편적 합의를 이루어 냈다. 함수나 정식이 없으며 누구도 개념이나 정의를 내릴 수 없지만 모두가 수용하고 인정하는 법칙으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적당한 게 좋다. 나도 이제 적당히 하자. 좀.






부산-서울 (31).jpg


비는 그쳤고 하늘은 맑다. 아침은 생략. 진천까지는 가지 못할 것 같아서 일찍 단념하고 터덜터덜 걸음을 옮긴다. 덥다. 날은 더웠다. 유난히. 아침과 점심의 중간에, 중간보다는 점심에 더 까까이 붙은 시간에 다가가서 밥을 먹고 물병에 물을 채웠다. 17번 국도. 중앙에는 분리대가 설치되어 있다. 겉만 뻔지르르 한 길. 도로변에 나무 한그루 없는 야박한 길. 깨진 유리 가루를 문지르는 것처럼 쏟아지는 햇빛은 피부를 뚫고 들어온다. 빛을 피할 수 없다.


길섶의 풀들과 논밭, 산과 들은 수정체와 각막을 만족시킨다. 그러나 그 만족은 시신경의 말단에서 모두 타버리고 만다. 더 이상 전달이 되지 않는다. 내게 온전히 전달되는 감각은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여러 번 뇌의 초초 초고화질 터치 스크린에서 반복적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매번 같은 단어가 깜박거린다.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그 단어는 '아. 덥다.'였다. 그래서 내가 더운 것이었다. 저걸 지워버리면 돼. 방법은 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좀 번거롭다. 내가 아스팔트와 잠깐이지만 볼을 부비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글거리는 바닥에 말이다. 자동차 바퀴 밑에 머리를 집어넣으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다. 그래서 그만두었다.


초록의 사막은 희망과 절망을 절묘한 레시피로 거듭나게 했다. 그러나 곧 문제가 생겼다. 수학 문제가 아니다. 생리학 문제와 유사 하지만 그것도 아니다. 사회과학이나 심리학의 문제는 더욱 아니다. 마실 물이 바닥났다. '물'리학.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시간이 문제라고? 아니. 시간문제라고. 그러니까 시간이 문제잖아. 그...렇지... 그게 아니고 시간이 문제가 아니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그 시간이 문제 해결의 문제라고. 젠장. 시간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문제가 된다. 아. 목이 탄다.





... . . . . . . . . . . . . . . . . . .

...

... 이 정도 여백이면 '아. 덥다.'의 수준으로, 내가 이글거리는 바닥에 볼을 부비지는 않았지만 그럴까 고민을 해 보았을 정도의 상태로 한참을 걸었다는 것을 충분히 표현했다고 본다. 입에서는 끈적한 젤라틴류의 액체가 굴러다닌다. 목구멍으로 넘기려 목젖을 덜컥 움직여 보지만 액체의 한쪽은 혀의 중간에 붙어있고 다른 한쪽은 목구멍의 중간쯤에 늘어져 달랑거린다. 물이 필요하다. 물. 가려움이나 재채기만큼 참기 힘든 것이 갈증이라고 방금 정의를 내렸다.


감히 예언할 수 있다. 나는 잠시 후에 볼을 바닥에 부비거나 신기루를 보거나 할 것이다. 예언자로 거듭나는 것이 이렇게 쉬울 줄이야. 눈이 반쯤 돌아가기 시작할 때! 바로 그때! 나들목이 보이고! 보이고! 이어서!... 이어서! 멀리! 멀리... 주유소! 주유소가 보인다. 만세! 신기루? 아니. 그 정도는 아니고. 분명히 주유소. 오... 나의... 캡틴.. 이 아니, 우물!


주유소를 향해 걸었다. 더위와 갈증으로 지쳐 영혼까지 허물어진 모습으로 당당하게 걸었다. 장담하건대 단 하나의 찰나도 거스르지 않고 주유소를 향한 눈과 발, 그리고 입안의 젤라틴 모두는 일치단결보다 더 일치단결된 모습으로 주유소의 외관을 제외한 나머지를 순삭 하고 오로지 주유소만을 위해 아니지, 물을 위해 걸었다.


유리창을 통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유리창을 통한 사람도 나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고. 확신할 수 있었다. 형태만 알아볼 수 있는 거리였지만 극도로 예민해진 감각은 확신을 주기에 충분했다. 찰나도 버리지 않은 나의 시선은, 고정된 시선은 모든 상황을 예견하고 싶어 했다. 결론을 미리 말하지만 정확하게 예견했다.


주유소가 조금씩 가까워지자 내가 바라보는 사람이, 유리창 안에서 나를 놓치지 않고 보는 그가, 여자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서로를 하나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고 있었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을 때 여자가 일어선다. 나는 알았다. 그리고 머리가 쒜에~ 하는 소리를 내며 긴장과 흥분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 동작은, 그 움직임은, 나를 위한, 나로 인한 것임을, 나는 알았다.


거리를 측정할 수는 없지만 실제보다는 멀게 느껴지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 먼 거리에 도달했을 때, 여자는 밖으로 나왔고 몇 걸음을 걸었고, 나를 향해. 그리고 서서 나를 기다렸다. 그리고 나는 한발 한발 또 한발 나아갔다. 그가 기다리는, 나를 기다리는 그에게로. 가까워지고 조금 더 가까워지고 그보다 더 가까워지면서 두 손으로 받쳐 든 물병의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더욱 선명해짐을 확인할 수 있는 거리가 되었다.


"물 얻으러 오셨죠?" ^^

"어떻게 아셨어요?"


어떻게 아셨어요? 정말 그것이 궁금했던 것일까. 음. 정말 궁금해. 내가 예상했던 것과 같은지. 나는 확신을 하나 해보기로 했다. 진정 내 요구가 다다랐을 것이라고. 절실함이라는 것. 욕망이 아니라 필요에 의한 절실한 요구... 였기 때문에.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 알게 된 것이라 믿는다. 때문에 내가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앉아서 기다리지도 않고, 또 너무 미리 나와 한참을 기다려 물의 온도를 높이지도 않았다. 부담가지 않을 만큼의 적당한 시간과 거리를 두고 영화나 뮤직비디오의 편집점을 찾아 맞추듯이 내가 자신의 모습을 보며 힘을 내고 흐트러지지 않을 거리에서, 자신도 뜨거운 햇빛에 힘들지 않을 만큼의 시간 안에서 물을 들고 마중을 나온 것이다. 진정한 마중물이라 할 수 있다. 물병에는 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품격 있는 배려와 인간애가 출렁거렸다.


돌아서 십여 미터를 가다 벌컥. 벌컥. 단 번에 물이 반으로 줄었다. '다시 가서 채워 달라고 할까?' 아니다. 다시 돌아가는 것은 멋져 보이는 행동이 아니다. 한 시간 뒤 후회했다. 멋은... 얼어 죽을. 아니 말라죽을...


6시. 야영장소를 찾아야 할 시간. 이정표. 진천 8km. 빠르면 7시 반 정도에는 도착할 것이다. 더 가자.

진천 종합운동장 주변의 공원이 규모가 좀 있는 편이다. 모기들은 2차 세계대전에서 살아남은 일본산 모기의 열성인자만 내려받은 것들이다. 표적을 보면 미 함대를 향해 돌진하던 전투기들처럼 단순하게 공격적이며 무모하다.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

모기가 싫다.


사람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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