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워진 마음. 내가 보일 때.
걷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싶은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더니 금방 기세 좋게 나뭇잎과 지표면을 세차게 두드린다. 비옷은 오분을 견디지 못한다. 몸이 젖기 시작한다. '집에 돌아가면 반드시 쓰레기 통에 처박아 버릴 테다.' 내 말을 알아 들었을 것이다. 알아듣게 말을 했으니까.
나무가 아닌 시멘트로 만든 육각정이 보인다. 버스정류장으로 사용되는 곳이다. 비를 피해 지붕 안으로 들어섰다. 여자가 한 명 있다. 버스를 기다리나 보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낡은 소파가 세 개나 있다. 아무도 앉아주질 않았나 보다. 한 때는 누군가의 자리로써 그 사람의 체중과 일상의 무게를 감당했을 것이다. 풀썩 주저앉으며 몸을 던져도 비명 한 마디 없이 말이다. 버려지는 것은 서럽다. 모두가 떠나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래도 살다 보면 그렇게 나쁘지 만은 않다.
여자분과 인사를 나누었다. 밭에 일하려고 나왔다가 비가 와서 남편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린다고 한다. 남편의 차를 타고 집에 가야 한다고 했다. 남편이 데리러 오면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주제넘은 생각이었다. 간식으로 가져왔었다며 보냉병의 음료를 밥사발 만한 뚜껑에 두 번이나 가득 따라 준다. 미숫가루에 호두, 깨, 잣 등을 함께 넣었다. 고급진 영양 간식이다. 입에서 씹히는 호두와 잣의 고소함은 기분을 좋게 만든다.
포도 두 송이도 준다. '무겁겠군.' 아들과 비슷한 또래 같다며 나이를 묻는다. 나이를 말해주며 여자의 나이를 헤아려 본다. 스물에 낳은 아들이 군에 갔다던 목수가 떠올랐다. 여자도 일찍 아들을 낳았나 보다. "꺄~악~... 동안이시네~" 내 나이를 듣고는 여자가 놀란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는 귀가 있는 방향으로 깜빡이도 켜지 않고 사정없이 무단 횡단을 한다. ㅋㅋ... 내가 그런 말을 좀 듣는 편이지. 짐의 무게도 줄일 겸 포도를 먹었다. 비가 줄어들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기다리는 것은 여기까지.
신탄진 방향으로 가려다가 갈림길에서 댐을 관리하는 사람에게 길을 물었다. 북쪽으로 가려면-재차 강조 하지만 월북이 아니다.- 댐을 건너 청주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말한다. 방향을 수정한다. 가는 길에 대통령 여름 별장인 '청남대'도 볼 수 있다고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시민들에게 돌려주었다. 잘했다. 잠시 쉬려고 들렸던 노점에서 복숭아 한 개를 받았다. 이제는 받는 것이 자연스럽다 못해 권리를 행사하듯 뻔뻔하다.
어제 더위를 과식하고 혼쭐이 난 터라 멀리 가지 않고 일찍 자리를 잡을 생각이다. 오후부터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선다고 한다. 비바람 걱정을 하며 '문의면'이라는 곳에 들어섰다. 평소보다 한 시간 정도 빠르게 지낼 곳을 찾았다. 가구 수가 많지 않은 작은 마을이 보인다. 한옥들이 눈에 띈다. 대부분 새로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인다. 은은하고 기품이 있게 세월을 보낸 정겨움 보다는 우리는 한옥 마을을 만들 거야 하며 나서는 느낌이다.
길 바로 옆이지만 정각도 있다. 옆에는 사십 년의 역사와 전통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가격도 싸고 맛있어 보이는 손짜장면집도 있다. 이만하면 최고는 아니어도 최적의 장소 선택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콧소리가 절로 난다. 우선은 시간도 여유가 있고 배를 좀 채워야겠다.
식당에 들어서자 많지 않은 시선이 집중된다.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한 분위기다. 눈길을 스윽 훑어주며 자리를 탐색한다. 어라? 홀이 따로 엄네. 신발에는 물이 한가득 철벅거린다. 벗고 들어가야 할 상황이다. 망설임이 쭈뼛함으로 진행되면 촌시럽다. 행동이 과감해진다. 당당하게 신발을 벗고 올라서자 물이 주르륵 흘러 바닥 장판에 고인다. 할 수 없이 양말을 벗었다. 발 걸레를 부탁하고 물기를 닦은 후 자리에 앉았다.
주문한 짜장면이 나왔는데 놀란 나는 몇 초간 짜장면 그릇을 빤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곱빼기의 곱빼기다. GOD의 노래가 생각났다. 어머님이 싫다고 하셨던 그 짜장면. 굉장히 많은 면들이 묵직한 산처럼 쌓여 있다. 더 놀라운 것은 그걸 다 먹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행색을 보고 그가 무엇이 필요한지 짐작 할 수 있다. 나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었다. 사람들은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알고 있었고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해주었다. 식당 사장님에게 고맙다 인사를 하고 앞의 정각에서 하루 묵어도 되는지 물었다. 동네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라고 한다. 사장님은 주민이 아니니까.
정각 마루에서 앉아 쉬었다. 주민으로 보이는 여자분이 지나간다. 하루 잠을 잘 수 있도록 양해를 구했다. 문제 될게 뭐 있냐며 알아서 하라고 한다. 가만히 앉아 비에 젖은 몸을 말린다. 맞은편 집에서 아기를 안고 여자가 나온다. 여자는 나를 보고 놀라야 할지 당황해야 할지 반응의 결정을 미루는 애매한 표정과 눈빛을 보인다. 불안한 미래를 예견하는 징조 같은 것이다.
그 여자는 잠시 후 다시 나타나 이것저것을 물어본다. 여자는 불안과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 여자의 태도에서 나에 대한 견해의 출발점을 찾을 수 있다. 경계심은 약간의 적대적 거리를 만들었다. 신분조회.
'의심할 수 있지.' 조금도 동요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다. 여자는 전화로 누군가에게 연락을 하고 잠시 후 할머니 한 분이 나타났다. 여자는 설명을 한다. 나는 다시 할머니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추가 질문에 대해 전혀 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정확한 어투와 편안한 표정을 보여주며 교양과 지성을 겸비한 여행자의 태도로 정성껏 답을 한다. 이런 훌륭한 시민을 내쫓는 것은 스스로 야박하다고 느껴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말이다. 뭐, 이렇게 까지 해야 되나 싶지만 지금 아쉬운 게 누군지는 확실하다.
그러나 나의 신중한 태도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이미 한쪽에서만 나를 보기로 작정을 하고 있었다. 서울에 전화라도 해서 내 신분을 확인시키고 싶었지만 하늘보다 높은? 자존심은 그런 유치한 짓을 마다했다. 그래서 참았다. 탐탁지 않은 눈치지만 자고 가도 좋다고 한다. 그러면 그렇지.
이 마을로서는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지혜로운 결정이었다. 마을의 역사에 오점을 남길뻔한 순간을 교양 있는 주민의 용기 있는 결정이 막아낸 것이다. 그래도 못 미더웠는지 할머니가 다시 슬금슬금 다가와 "나쁜 사람 아니죠?" 한다. 그 질문은 언어의 기능에 대한 생각으로 나를 보낸다. '아뇨. 나는 아주 나쁜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할 나쁜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급히 비트겐슈타인을 끌어들여 마무리한다. '언어는 용례에 따른다.' 말 트집은 잡지 말자.
원래 동네에서는 외부 사람을 잘 재우지 않는다며 이래저래 말을 돌린다. 이런 때일수록 하늘보다 높은 내 자존심이 상처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곤란하시면 빨리 가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금방 어두워질 텐데 그러면 내가 곤란하거든요. 보시다시피." 이미 펼쳐 놓은 짐들을 인질로 삼고 아쉬울 뿐 미련이 없다는 나의 당당함? 에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라며 걱정이 돼서 그렇다고 물러선다. 불안하고 의심스러운 마음을 전혀 알 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기분은 그냥 좀 그렇다.
모두 돌아가고 이제 편히 쉴 수 있겠다 싶어 양말도 벗어 물기를 짜내고 난간에 널었다. 9시 이후 정도면 인적이 뜸해질 것이라 생각해 그때 텐트를 설치하려고 앉아서 기다렸다. 비도 잠시 그쳤다. 시간은 7시를 넘어서고, 낮은 구름은 밤을 일찍 불러들이고 있었다. 여자와 할머니 그리고 한 여자가 다시 나를 찾아왔다. 아. 그 불길한 징조의 증명.
주민들의 의견을 물었단다. 더는 듣지 않아도 되지만 나는 듣고 있었다. 그리고 곤란하단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금 곤란한 것은 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사이 주민 비상소집이라도 했단 얘긴가. 그들은 차라리 떠난다고 했을 때 미안한 척하면서 그냥 내버려 뒀어야 했다. 이제 와서 안된다니. 난감하다. 날은 이미 어두워지고 태풍도 먹잇감을 기다리 듯 내가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이 굳어져가는 것을 느끼며 서둘러 짐을 꾸렸다. 널어놓았던 양말을 다시 신었다. 양말은 차갑고 더욱 축축했다.
걷는 동안 섭섭한 마음이 한 동안 떠나질 않는다. 이미 밤이 되었다. 인심 허구는 참. 자동차 불빛만 가끔 스친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다행히 바람은 많지 않다. 빗물이 몸 안으로 흘러들어 오자 마음이 더욱 딱딱해지기 시작한다.
'우라질! 젠장! 염병할!' 속에서는 욕설들이 들끓기 시작한다. 사람들에 대한 원망과 함께 자아가 다시 양분된다. '그럴 수도 있지.' '그들 입장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거 아냐?' '맞아. 나를 언제 봤다고.' '그래도 그건 아니지.' '만약에 내가 위험한 사람이었다면.' '그 사람들은 현명한 결정을 한 거야.' 하지만 문제는 내가 도둑이나 범죄자는 물론 위험한 사람이 아니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것이 나만 아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나는 열이 받았다.
이미 나의 이성은 패퇴하고, 이타심은 절망에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했다. 깜깜함. 피곤함. 축축함. 발과 관절의 통증. 내리는 비. 하지만 계속 걸어야 하는 나. 이 모든 것은 내가 원치 않는 것들이다. 이 모두가 나를 내쫓은 사람들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원망한다. 정신의 승리는 개뿔.
이제 모든 화살을 자신에게 겨냥하고 못난 심장에 마구 쏘아댄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오늘 아침에 느꼈던 사람에 대한 긍정과 사랑은 어디로 갔을까?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할 것 같았다. 해탈한 줄 알았다. 제기랄.
우라질을 외치며 걷다 보니 멀리서 제법 큰 도시의 불빛이 보인다. 도시의 불빛이다. 청주. 불빛은 이내 심리적인 안정을 돕는다. 거리를 가늠해 보지만 확신이 서지 않는다. 불빛은 직선으로 와 닿기 때문이다. 이정표가 보인다. '청주 8km' 예상했던 것보다 멀다. 거리 정보는 발을 빠르게 움직이도록 한다. 오늘 이후로 다시는 걸을 수 없는 사람처럼 걷는다. 빗줄기가 굵고 빨라진다. 바람이 점점 세게 불어온다.
청주 도착.
공원이나 공터를 찾기에는 모든 게 한계에 와있다. 스스로 타협안을 내놓는다. 모든 것이 젖었다. 밤새 비와 바람도 세차게 몰아칠 것이다. 따뜻한 물에 샤워라도 해야 피로를 풀고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내일도 비가 계속되면 빨래도 큰 문제가 된다. 그래 좋다. 협상 일괄타결! 모텔 결정.
숙박료 삼만 원.
샤워. 신발과 옷가지 세탁.
비바람이 거세다.
창문에 비친 내가 보인다. 잘났다.
나는 오늘 허약한 자아를 다시 만났다. 이런 역사적 상봉은 왜 언제나 타인을 통해서만 가능 한가. 타인을 통하지 않고는 나를 보지 못하는 이러한 관계의 역설은 내 인생 곳곳에서 말뚝처럼 박혀있다.
싫은 사람을 좋아할 수는 없다. 슬픔이 기쁨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대비됨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증명하고 드러낸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나를 드러냈다.
나를 알고 싶은 나는.
그래서
사람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