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립 보행을 확인하다. 13

뜨거운데 하얗다.

by 아무개





6시.

눈을 떴다. 모기는 피보다는 내 잠을 필요로 했다. 상당한 양의 잠을 머리 위에서 맴돌며 탈취해 갔다. 잠이 들만 하면 머리 주위를 맴돌며 높은 주파수의 공포스러운 소리를 쉬지 않고 낸다. 성실한 수금사원.


주방에서는 아침을 준비하는 소리가 난다. 아침 공기를 마시기 위해 밖으로 나가려는데 어머니가 벌써 가려고 하느냐며 손사래를 친다. 아침은 꼭 먹고 가야 한다고. 가지 않을 테니 걱정 마시라고 했다. 그럼 밥 먹기 전까지 좀 더 자라고 한다.


대청호를 바라보았다. 수분이 가득한 구름 사이로 아침이 붉어오고 있다. 바람이 불어온다. 높은 곳에서 맞는 바람은 쾌적함 보다는 기분 좋게 도전적이다. 그래서 삶을 전망하려는 가슴을 키운다. 바람은 남아있던 졸음과 투과율을 낮추던 머릿속 먼지들을 깨끗이 날려 버린다. 붉고 푸르게 물든 구름들이 더 낮게 내려오고 있다.






현관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서려는데 빨래를 널어놓았던 작은 방에서 누군가 빠르게 비켜나는 것이 보인다. '그림자를 보았다'라고 쓰는 것이 더 좋을 만한 순간이었다. 헤어드라이기 소리가 들린다. 아들이 머리를 말리나 보다. 아침 인사를 하려는 순간 직감이 생각의 앞을 가로막는다.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어온다. 오감은 상황을 논리적으로 규명하려 했지만 직감(육감)이 압도적인 크기로 제압한다.


내게는 이 짧은 순간이 복잡하게 얽힌 감각과, 판단의 혼란으로 기억된다. 지금도 알 수 없는 감정의 경험이다. 직감. 그것이 발동하면 피하거나 막을 수 없다. 뇌에서는 망상이라는 논거를 바탕으로 자신의 판단을 확신하는 의처증 환자처럼 강한 파장을 활성화한다. 하지만 직감은 판단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지는 않는다. 그 비밀스러운 힘에 거부하지 못하고 이끌려 갈 뿐이다. 머리는 복잡하지만 행동은 간결하다.


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올 때 그림자는 분명 나를 피하려듯 빠르게 퇴장했다. 왜? 나를 피한다고? 그럴 리가. 그렇게 보였는데... 그럴 이유가. 혹시? 직감을 지지하려는 생각들의 세력은 비례 정당 의석을 독차지할 만큼 커졌다. 머리를 뭔가 때리고 지나갔다. 어질 하며 호흡이 가빠진다. 심장도 빨라진다. 직감을 확인한 듯이. 슬쩍 엿보며 확인하고 싶다. 모른 척 마당으로 다시 나갈까. 신발도 벗지 못하고 몸의 중심만 거실과 마당 쪽을 번갈아 옮겨가며 갈등을 한다. 나와 마주치면 더 민망할지도 몰라. 마음을 대충 가다듬고 숨을 크게 쉬고 방으로 들어갔다.




"일어나셨어요?"

아들은 내 양말의 목에 드라이기를 넣고 뜨거운 바람을 불어넣고 있었다.

"어제 드라이기로 좀 했으면 다 말랐을 텐데..."

말끝을 뭉개며 겸연쩍어한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어제저녁 선풍기 바람에 옷걸이를 시간마다 뒤집어 주며 말려주던 장면이 지금의 모습과 겹쳐진다. 목구멍이 오그라들며 뜨거워진다. 밖으로 나왔다. 하늘을 본다. 숨을 크게 쉰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 생겨난다. 뜨거운데 하얗다. 내가 드디어 해탈을 하려는가 보다.


어머니와 아들은 주방에서 아침을 준비한다. 아들이 어머니를 거드는 소리가 달그락 거리는 소리와 섞여 나지막이 들린다.





아침 밥상.

내 밥그릇 위에 그릇 하나가 더 엎어져 올려 있었다. 어설픈 밥주걱의 경력으로는 도저히 쌓아 올릴 엄두도 내지 못할 만한 높이의 마음이 쌓여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또 한 그릇이 가득 담긴 채로 놓여있다. 남기는 것은 괜찮지만 부족하게 할 수는 없다는, 말보다 강한 여분의 밥 한 그릇. 먼 길을 가려면 힘을 내야 한다며 삼겹살을 한 접시 구워 내준다.


어머니는 역시 작은 상을 밥, 국, 김치로 가득 채우고 방 문턱을 경계로 거실에서 식사를 하신다. 아들은 따뜻할 때 먹어야 한다며 계속 삼겹살을 권한다. 내가 삼겹살에 손을 대지 않자 아들은 먼저 한 점을 가져간다. 이어서 나도 한 점. 또 한 점. 그리고 또... 아들은 이 후로 삼겹살을 먹지 않았다. 나는 남기지 않고 접시를 비웠다.


떠나기 위해 거실 벽에 기대어 놓은 배낭을 들어 올리려는데 옆에 검정 비닐봉지가 있다. 손자가 사 온 포도 두 송이가 깨끗이 씻어 넣어져 있다. 조심해라. 너무 무리하지 마라. 비가 온다는데 쉬엄쉬엄 가라. 걱정과 당부를 하고 또 한다. 나는 큰 수술을 받고 퇴원하는 환자처럼 조심스럽지만 새로워진 세상을 만난 것 같았다. 되도록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머니는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내 뒤를 갈무리한다.






짙은 구름은 더욱 힘겹게 땅 위로 늘어지고 있었다. 걷는 동안 하룻밤의 여운이 점점 커지며 거대한 파도처럼 일어났다. 두 사람을 생각할수록 파도는 그렇게 계속 자라더니 이내 감당할 수 없는 크기로 덮쳐왔다. 그리고 감동은 어느새 충격이 되어 버렸다. 모든 것이 뒤섞이고 어지럽혀진 것 같았다. 마음은 경계 없이 공허하고 생각은 질서를 잃었다. 나는 그렇게 흔들리며 부서지고 있었다.





두 사람을 생각하며 걷는다.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오래된 형식.


최종적으로 내가 향하고자 열망하던 곳.


내 여행의 종착지.




그곳에.


두 사람이 있었다.
















이전 13화직립 보행을 확인하다.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