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립 보행을 확인하다. 15

실루엣. 대청호 어머니.

by 아무개



비가 오신다.

굵은 빗방울을 탓하며 하루를 방 안에서 뭉개고 있다. 비바람에 발목을 잡힌 것이 원망스럽다. 그 원망 안에는, 더 확실하게 말해 원망을 가장한 안도의 한숨과 자기 정당화 안에는, 의무로 성장한 의지와, 방어권을 행사하려는 육체의 갈등으로 상처 받지 않기 위해, 태풍이 더욱 강해지기를 바라는 소망, 육체의 소망이 깃들어 있었다.


빗방울... 나는 굵고 씩씩하게 직하하는 그것들이 내 의사를 결정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어떠한 만남이나 주변의 변화도 없이 '도전 방구석'이 되어버린 하루는 희미한 조명의 모텔 방에서 내 취미를 되살려 내는 시간들이 되었다. '희미한 조명의 모텔 방'이 내 취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방은 망상의 껍질이며 가끔은 그 범주를 규정하는 환경이 된다.


여러분들도 '희미한 조명'과 '모텔 방'은 어떤 이미지와 연관되며 또 그 이미지는 어떤 감정을 건져 올리는지 생각해 보시길 바란다. 왜냐하면, 아니... 뭐. 그냥...


조명이 희미하면 사물을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진다. 방 안에는 모든 것이 액자를 갖지 못한 오래된 유화처럼 아무렇게나 구겨진 채 버려져 있다. 평면. 억눌린 색채. 희미한 형태. 어른거리는 윤곽. 실루엣. 아. 그래 실루엣. '역광'으로 드러난 검은 윤곽. 그것은 강한 인상을 준다. 검은 형태의 신비감은 완벽하게 드러난 것보다 더욱 노골적이다.


역광은 강렬하지만 본질은 부정적이다. 신비감은 알 수 없는 것에서 도달하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긍정할 수 없듯이 실루엣은 그 검은 강렬함으로 우리를 압도하고 선망하게 만들지만 결코 긍정할 수는 없다. 빛은 정녕 눈을 멀게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드러나게 해 주길 우리는 바란다.


순광. 그러나 방은 물기를 먹은 화선지에 흐린 먹물이 번지듯, 퇴근길에 생각난 새벽꿈이 꿈을 꾸었다는 사실만 남듯이, 그렇게 불분명한 노출로 내 주위를 감싸고 있다. 수명을 다한 순광의 희미함도 실루엣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어둠.


방안은 특유의 흐리멍덩한 실루엣으로 특별한 인상을 주지도 못한다. 다만 중년의 난민이 간직한 지루한 삶의 애착을 아주 조금 덧칠했을 뿐이다. 희미한 윤곽들을 바라본다. 인상적이지 못한 인상. 창밖에서 바람에 내몰리며 흔들리는 빗줄기와 그 소리와, 눈에 보이는 바람소리와, 내 망상이, 틈을 비집고 방 안으로 들어온다.


방안의 그림들은 이내 차원을 벗어나 몽롱한 빛의 물감을 쏟고, 창밖의 소란함이, 희붉그레한 사물들이 붙어있는 평면의 그림을 일어서게 만들었다. 그 평면의 윤곽 안으로 내가 들어간 것이다. 나는 평면이다. 평면이 보는 평면들은 입체다. 이런 몹쓸 관념.






무언가 적으려고 수첩을 꺼내 놓았다. 무엇을? 우산을 빌려 쓰고 나가 사 먹은 점심 메뉴에 대해서, 또는 널부러져 있는 옷가지와 배낭, 침낭, 양말, 운동화, 코펠, 그리고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릴 판초 등. 이것들에 대해서? 동일화를 통한 철학적 고찰이라도 해볼까. 아니면 테레비 프로그램의 주제와 연출과 구성은 어떠하며 한편으로는 거시기하다는 것이라도 써볼까.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지 말자.


생각 없이, 생각에 대한 각성 없이 있는다. 멍 때리기. 피로 해소에는 우루사도 박카스도 아닌 꿀잠 다음으로 멍 때리기가 좋다. 계속해서 창밖을 보고 있었다. 전화벨. 계속 보고 있다. 다시 전화벨. 귀가 눈을 가린다. 또다시 전화벨. 귀가 눈의 방향을 바꾼다. 머리도 돌아간다. 알 수 없는 발신번호. 망설인다. 통화 버튼을 누른다. "여보세요." 반쯤 잠긴 목소리. "아이구... 이렇게 비가 오는디 워치기 간댜..." 대청호 어머니...


비 맞지 말아라. 쉬었다 가라. 통화 내내 이 말씀만 되풀이하셨다. 나는 지금 쉬고 있고, 비가 그치면 떠날 것이라고 거듭 약속을 하고 안심을 시켜드렸다. 전화를 끊었다. 다시 창밖을 보았다.





비는 더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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