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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에스 Sep 16. 2023

1. 방송국을 그만두다

코로나와 더불어 불안한 미래에 매일 낙산공원을 올랐더랬다.

방송국을 그만뒀다. 나는 도급 업체 소속으로 방송국에서 일했다. 3년이 됐을 무렵 내가 소속된 도급 업체가 방송국에서 정리되었다. 덩달아 나도 정리되었다. 물론, 선택할 수 있는 기회는 있었다. 그러나 나는 굳이 다른 도급 업체로 옮기지 않았다. 이전부터 막연하게 서른 살이 되면 다른 회사를 다니고 싶었기 때문이다.


방송국에서는 디지털 뉴스 편집팀에서 일했다. 일하는 동안 부서 이름이 참 많이도 바뀌었지만 오래 불리던 이름이자 하는 일을 가장 잘 설명하는 이름이다. 기자들이 쓴 기사를 교열하고 교정해서 인터넷에 업로드하는 일을 했다. 인터넷에서 보는 뉴스 기사는 전부 이런 과정을 거친다.



출근 마지막 날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점심을 먹고 자리로 돌아오니 꽃 바구니가 내 책상 위에 있었다. 보낸 사람 이름은 없었지만 나는 누가 보낸 꽃인지 알 것 같았다. 다른 부서로 발령 난 이전 부장님 일터였다. 회상하자면, 나는 누구보다 호응을 잘하는 직원이었다. 시답잖은 아재개그에도 웃고, 못 할 것 같은 일에도 일단 “네!”를 외쳤다. 아재개그는 내 개그 코드와 맞았고 못 할 것 같은 일은 우선 하겠다고 말한 다음에 해보고 안 되면 그때 안 되는 이유를 말해도 늦지 않았다. 내가 못 한다고 해서 나에게 실망하는 부장님은 없었다. 그렇게 일을 했더니 나를 좋게 보는 부장님이 생겨났다. 그 부장님이 나의 퇴사 소식을 듣고 꽃 바구니를 준비해 주신 것이었다. 나는 그 꽃 바구니를 보며 허투루 회사를 다닌 건 아닌가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겨울, 한아름 선물을 들고 퇴사했다.


일주일 후 나는 새로운 회사에 출근했다. 집과 정말 멀었던 회사는 내가 생각했던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계약서를 쓰기 전이었는데 엄마, 아빠 앞에서 울면서 출근하기 싫다고 말했다. 내 나이 서른 살에 세 살이나 하는 일을 했다. 나는 새로운 회사를 그만두고 실업 급여부터 신청했다. 진정한 백수가 된 것이다.


논다는 생각에 마음 한편은 불편했지만 몸은 참 편했다. 솔직히 처음 몇 달은 실컷 놀았다. 방송국에선 스케줄 근무를 하는 탓에 남들 쉬는 날 쉬지 못했다. 실로 오랜만에 주말의 달콤함을 느꼈다. 그때는 기사 쓰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일도 금방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달이 지나고 면접을 볼수록 나는 자신감을 잃어갔다. 이 세상에 나를 원하는 회사는 한 군데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낙산공원을 올랐다. 이유는 단순했다. 집에서 가까웠다. 해질 무렵 낙산공원을 올라가면 정상에서 도착할 때쯤 노을과 함께 개미 같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 생각 속을 거닐다 보면 밤이 찾아왔다. 다시 낙산공원 아래로 내려가면 네온사인 사이로 수많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생기 넘치는 표정을 보며 내가 쓸모없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내 본다.


실업급여는 받을 수 있는 날짜가 정해져 있다. 그리고 실업급여가 끊기기 한 달이 남은 시점이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나의 취업!’ 나는 그 여느 때보다 취업이라는 열의에 차 있었다.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력서를 넣었다. 그리고 면접 연락이 온 곳이 지금의 회사이다. 강남에 있는 영상 제작사. 강북에 20년 넘게 살며 강남으로 출퇴근하겠다는 생각은 살아생전 해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영상 제작사는 무슨 일을 한단 말인가? 단지 ‘스튜디오 관리’라는 단어를 보고 ‘할 일 별로 없겠는 걸?’이라는 단순한 생각뿐이었다. 여기서 적당히 일하다 런(RUN)해야지. 그렇게 나는 면접을 보러 갔다.


나는 파워 J이다. 내일 할 일이 정해져 있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나에겐 매일 계획을 짜는 일이 익숙하다. 지금의 회사를 다닐 때도 내 인생에서 잠시 스쳐 지나가는 징검다리가 되리라 생각했다. 내 인생 계획에 이 회사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3년째 강남으로 출퇴근하고 있다. 역시 인생은 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는 안다. 그게 바로 인생의 묘미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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