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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니스 Jan 02. 2023

4. '어리버리함'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들

ADHD는 멀티가 되지 않아요

몇 번이고 글을 쓰다 지우길 반복했다. 나의 치부를 드러내고 부족함을 직면하는 과정은 언제나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늘의 글은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하기도 하다. 이 공간이 굳이 *하숙생과의 육아 관점의 차이나 나에 대한 배려와 이해를 운운하며 그를 뒷담화 하는 성토의 장이 되는 건 원치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를 향해 앙금처럼 남은 '서운함'과, 내 증상에서 비롯하는 사소한 실수와 비효율적인 수행 대한 그의 '불만'은 아주 냉철한 판단과 통찰을 바탕으로 분리해야 하는 대상이기도 하겠다.


기본적으로 하숙생은 입육아가 주 업무이긴 하지만, 일단 시키면 나보다 세심하고 구체적으로 아이들을 잘 챙기고, 효율적이면서도 체계적으로 일을 잘 처리, 마무리지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평소에는 웬만해선 참고, 기다리고, 나의 부족함을 수용해 준다는 점에서 내 제2의 양육자이기도 한 셈이다. 그렇기에, 그런 그에게, 나의 정신없음을, 어리버리함을, 때론 넘쳐나는 비효율을 모두 이해만 해달라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말이 안 되는 바람이기도 하겠다. 눈에 흙을 뿌려 넣어도 안 아플 거 같다는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도 답답하고 용납 못하는 지점이 발생하는데, 심지어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남 관계에서 무조건적인 수용과 이해를 바라는 건 양심이 없는 거지.




어제는 일요일이었다. 안타깝게도, 1월 1일을 맞이하는 나의 상태는 들뜸이나 설렘, 혹은 새로운 시작의 다짐과 함께하는 힘찬 마음이 아니었고, 어쩐 일인지 왕창 늦잠을 자 버린 후 한껏 어수선한 마음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원래라면 다른 이 씨들 보다 나는 적어도 30분은 먼저 일어나 짐을 챙기고, 정해진 루틴에 따라 교회로 향할 준비를 해야 그나마 안정적인 하루의 시작이 가능한데, 어제는 그 루틴을 장착하고 따라갈 마음의 여유 없이 갑작스러운 스타트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굳이 불만을 적자면, 내가 아이들을 씻기고 준비시키고 나 스스로까지 치장하는 동안 하숙생은 자기 몸뚱이 하나만 건사하면 되는 건데, 여기서 발생하는 누락과 실수는 모두 나만의 문제가 된다는 점이다. 나는 도움을 청하지 않기도 하지만, 그는 유독시키는 건 잘하는데 시키는 것만 잘하는 자율성이 결여된 인간이라 서로 간의 상호호혜성이 현저히 결여되어 있다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도 존재하겠다. 7년을 함께 했지만 여전히 숱한 타협과 이해의 과정을 필요로 하는 미숙한 가족이라는 것 역시 여기서 드러나는 것이다.


각설하고, 어제는 그래서 내가 많이, 아주 많이 멍했다. 말은 꼬이고, 뭘 챙겨야 할지, 뭘 빠뜨렸는지, 머릿속에 그림조차 그려지지 않았는데, 애들은 여차저차 준비를 마쳤고, 일찌감치 준비를 마친 하숙생은 얼른 출발하자며 닦달했다(이미 예배시간이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기에). 열은 떨어지고 타미플루도 다 먹었지만 기침이 심해서 외출이 될까 말까, 둘째에 대한 고민 역시 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온갖 잡념과 걱정들이(둘째의 기침으로 인해 다른 아이들이 아프게 되고, 그러면서 내가 원성을 사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면 어쩌지 하는 등등의) 효율적인 사고와 외출 준비를 더디게 만들었고, 나는 말 그대로 우왕좌왕, 어버버버, 들락날락 난리도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둘째 기침약과 패치도 다 빠뜨렸고, 평소보다 뭔가 헐빈한(그렇지만 뭐가 빠진 지는 알 수 없는) 상태의 짐가방을 챙겨 차에 올라탔다. 한참을 달려 하숙생이 물었다. '패치랑 기침약은 챙겼냐' 하고.


 아! 맞다!


이 즈음에서는 이제 멘붕이 시작되는데, 내가 나를 스스로 자책하며 우울해지는 동안, 하숙생은 또 다른 미션에 대한 확인을 하기 시작한다. 나는 이전 문제를 아직 해결하지 못했지만, 성격 급한 하숙생은 혼자 달려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또 우리는 엇갈리는 지점이 발생하고 만다. 기다림이 필요한 자와 그 기다림을 헤아리지 못하는 자. 기다려달라는 무한의 요구는 어느 지점에서 이기심으로 변질되고, 그 반대편에는 기다림에 지쳐 짜증과 화를 참아내야 하는 또 다른 이가 팽팽이 맞서게 되는 것이다.


얼른 약을 한 알 먹었다. 하지만 약효가 발휘되고 머릿속이 좀 선명해지려면 최소 30분에서 1시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숙생은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다. 일단 그의 머릿속은 온통 둘째의 기침약으로 가득 찼을 테니까. (그럴 거면 집에 있으라고 하지 왜 같이 나가자고 한 것인지). 기침을 임시방편으로 가라앉혀 줄 상비약을 구매하기 위해 교회 주변의 약국을 찾아봐달라 나에게 부탁을 해 왔다. 하지만 난 또 우리의 동선과는 영 관계없는 엄한 동네를 거론하며


'**병원 뒤에 가면 당직약국 있는데'


라고 답했다. 하숙생이 깊은 한숨을 나지막이 내 쉰다. 그 모습에 난 두 번째 멘붕이 오고 만다. 여기서 그 동네 이름이 나와서는 안 되는 거였다. 병원 얘기가 나온 김에 아이들 실비 보험 처리로 주제가 전환 되었는데, 병원 서류를 모아 아이들 보험을 맡긴 선배에게 주면 좋겠다고 하숙생이 얘기했다. 난 여기서 '둘째 거는 내 앞으로 되어 있지 않아?' 라며 또 주제에 엇나가는 반응을 해 버렸고, 여기서 하숙생이 꾸역꾸역 붙잡고 있었던 이성의 끈이 뚝, 하고 끊어져버렸다.


"그냥 집에 갈래?"



흥. 그런 무의미한 질문을 던지다니. 기본적으로 성격이 매우 급하고, 불도저 같은 면이 다분한 그로써는 이런 내가 이해될 리 없음은 인정. 심지어 직업상으로도 개발팀의 팀장으로 있으니, 어리바리 귀신 시나라 까먹는 소리나 하고 있는 사람을 볼 때 얼마나 한심하고 답답하겠는가. 그래도 우린 동료이기 이전에 가족이고 부부인데,라는 생각이 잠시 스치며 서운해지고 만다. 더 이상 그에게 말을 먼저 걸지 않았다. 한 걸음 뒤로, 아름다운 거리 유지하기, 내 생존 전략을 펼친다. 그도 이내 또다시 본인의 '분노장' 적인 본성이 튀어나왔음을 인지했는지, 한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교회와 가까운 곳에 휴일 근무하는 약국을 찾아 약을 산 뒤에야 우리는 평화를 얻었다.


그가 불같이 타오르는 모습은 대부분 그 순간뿐일 때가 많다. 건드리거나 비아냥대며 대놓고 싸움을 걸지 않는 이상 웬만하면 평정심을 빨리 되찾는 사람이다. 통찰력도 좋은 편이니, 그 순간 자신의 욱함이 과했다는 것도, 내가 왜 그토록 정신 못 차리고 있는지도 파악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가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다면, 사람의 감정을 캐치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 본인이 나에게 성질을 낸 뒤로, 나는 온종일 저기압이었지만, 평소에도 나는 그렇게 감정 변화를 격하게 드러내지 않는 터라 그가 눈치챌리 만무했다. 더군다나 혼자 화내고 혼자 괜찮아진 어제 같은 상황이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살피고 본인이 미친 영향력에 대해 고민해보는 시도는 더더욱 부족할 터. 그냥, 말을 말자 싶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에 대한, 삶에 대한 현타와 자괴감이 +1 상승하였다. 너그럽지 못한 그의 문제라고, 부부면서 왜 그 정도도 용납 못해주는가, 혹은 답답하면 네가 짐을 챙기지 왜 못 챙기는 와이프를 몰아세우는가, 와 같은 질문은 굳이, 싶을 만큼 불필요하다. 그렇다고 그가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무엇보다 나름의 최선으로 나를 용납한다는 신뢰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일 테다. 나 또한 그에게 서운하기만 할 수는 없는 것 역시 같은 논리로 이해된다. 역지사지해보면 답이 나오는 문제이기도 하고 말이다. 애들은 어리기라도 하지, 나이 40 가까이 먹은 어른이 이렇게 많은 손을 필요로 한다면 그 또한 얼마나 답답한 일이겠는가.




멀티가 되지 않는다. 하나를 끝내기 전에 다른 미션을 주면 앞서하던 과제는 마무리 짓지 못한 채 주의가 공중분해된다.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어수선함이 내 전부가 되어 버린다. 나 조차도 이런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과정에 있으니, 고작 7년을 함께 한 하숙생은 더더욱 심난하고 당황스러울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물론, 그에게도 내가 이러이러하니 저리저리 해 달라 요구는 할 테지만, 내가 그렇다고 해서 온전해지는 것은 아닐 테고, 그 역시 나로 인해 감내해야 하는 스트레스가 영영 사라지는 것도 아닐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옅은 갈등이 스쳐간 하루는 유난히도 길고, 피곤하다. 삶은 긴장의 연속이며, 긴장의 끈을 놓는 순간 어느 방향에서 나를 헤집고 들어올지 모르는 불완전함과 부주의함의 공격에는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날은, 이런 날을 보낸 후 맞이하는 일상은, 유난히도 무겁고 우울하여, 익숙하고도 낯선 무력함에 빠져들기도 하는 것이겠다.



*하숙생 : 동거인, 애들 아빠, 남편 등등의 호칭으로 불리는 반려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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