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유리처럼 허약했다.
오늘 검사할 환자는, 어제 도박으로 1억을 날려 기분이 상당히 날카롭고 성마른 상태라며 간호선생님이 귀띔해 주신다. 일단 해 보고 정 협조 안되면 drop하겠노라 언지 드렸다. 환자가 들어오기 전에 그가 작성해 온 문장완성검사와 그간의 진료 차트를 다시 한번 훑어 보았다. 이혼가정, 부친의 폭력, 분노 발작과 이로 인한 크고 작은 폭력 episode, 어머니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여성에 대한 알수없는 분노와 적개심 가득한 기록들. 짧은 순간이었지만 머릿속이 꽤나 복잡해지고 긴장감을 느끼던 찰나, 깡마른 체구에 날카로운 인상을 한 청년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껄렁껄렁한 말투와 걸음걸이는 문이 닫기든 말든 신경쓰지 않았고,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는 둥 마는 둥, 대답도 하는 둥, 마는 둥 초반엔 상당히 비협조적이려나, 걱정이 들 정도로 삐딱한 태도가 몸에 베인 청년이었다.
애써 더 밝은 목소리와 제시쳐를 사용해가며 검사를 진행했다. 권위적인 대상을 향한 그의 원망과 적대감을 건드려서는 안될것 같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1학년에게도 쉽사리 베풀지 않는 친절을 보여주고 있자니, 살짝 현타가 오기도 하고, 그가 나를 호구로 보려나 하는 가짢은 걱정이 들기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무료하게, 기계적으로 진행되는 검사가 있는가하면, 말 한마디 한마디가 살얼음 같이 예민하고 조심스러워 온 신경이 곤두서는 검사가 있다. 그런 검사를 한 날이면 그 환자는 머릿속에 남는 게 아니라 한 동안 가슴에 저밋하게 남아버린다. 그리고는, 삶이란 무엇인가, 늘 꼬리처럼 물고 다니는 그 고민이 참 우습고 한없이 가벼워져 버린다.
경계심 가득한 눈빛 사이로 세어 나오던 절망과 두려움의 sos. 하지만, 자신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은 너무나도 자기파괴적인 것이었다. 그 어떤 희망도 욕구도 즐거움도 존재하지 않은 공허한 삶을 채우기 위한 일순간의 쾌락. 이에 더하여, 사람은 믿을 수 없고 진실되지 않으며, 오로지 돈 만이 자신을 지켜줄 수 있다는 왜곡된 신념. 19세 밖에 안된 앳된 청년을 저토록 병들게 한 것은 무엇일까. 이럴 때면, 고작 검사나 하며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외에 그 어떤 것더 해 줄 수 없는 먼지 같은 생에 또 한번 무력감을 느끼곤 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고통받는 이들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끼거나, 그들을 동정하거나, 혹은 뭔가 액션을 취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오만한 짓이라는 생각이 반대편에 늘 자리잡고 있기에, 그를 향한 알 수 없는 슬픔마저 모른 척 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늘, 나는 비겁해 보인다.
19세, 성인의 나이와 신체를 가졌고, 그의 굴곡진 지난 시간은 나보다 더 험한 경험들로 점철 되어 있을지언정.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는 그 눈은 부모님이 이혼하시며 엄마가 자신을 떠나버렸던 9살 소년의 슬픔으로 가득차 있었다.
면담을 마친 뒤, 더 해 줄 말이 혹시 있느냐는 질문에, 갑자기 군대 문제, 분노를 참지 못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과 불만 등을 한참 더 털어 놓았다. 그러고도 말없이 허공만 한참 보고 있길래, 그렇게 잠시 내버려두었다. 헤어지며, 약을 잘 챙겨먹고, 진료도 되도록이면 꾸준히 받으러 오라고 얘기해 주었다. 툴툴거리면서도 한 껏 부드러워진 눈빛을 짧게 마주하며 검사실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에, 어떻게든 잘 이겨내었으면, 하는 응원을 보냈다. 원래, 삶 자체가 고통이라 하지만, 그 고통의 무게가 모두 같지만은 않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의지와 무관하게, 미숙한 어른들의 잘못을 물려받아 버린 그 억울함이 치유될 수 있길. 오늘은 술 없이 약 없이 편안한 잠에 들길. 내일은 오늘 보다는 한 번 더 웃을 일이 생기길. 20대의 첫 걸음이, 그 하루하루가 무탈히 흘러가길. 그렇게 바래 볼 뿐이다. 사람들이 그를 무엇이라 욕하더라도, 나는 그가 지닌 빛을 봤으니, 그것이 언젠가 위안과 위로가 되어 주기를. 그렇게 기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