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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니스 Nov 19. 2021

[스트레스의 중요성]

성취압력이라는 명암에 관하여

2021.11.19

오늘은 금요일, 종합심리검사 1case를 실시하는 날이다. 내가 일하는 소아정신과는 ASD 아동들이 많기도 하지만, 정작 검사 예약은 내년 4월까지 full battery 검사로 밀려 있는 상황이다. 물론, 원장님이 애초에 일주일에 full battery 3case이상은 무리일 것 같다라는 판단하에 일주일에 쳐내는 검사 자체가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찌 되었건, 개원 이래로 일주일에 두 건씩 매주 다양한 아동과 청소년들의 심리상태를 열심히, 지독히 염탐하는 중이다.




오늘은 만 16세의 고등학교 1학년 남학생과의 검사를 진행하였다. 덩치는 왜소했지만, 과하지 않은 펌이 들어간 머리에 안경을 쓴, 꽤나 댄디한 인상의 학생이었다. 낯가림이 심한건지, 조금은 까칠한건지 아리까리한 줄타기를 하는 그 남학생과 오전 10시부터 검사를 시작해서 오후 2시가 되어서야 모든 검사 종료. 그것 마저도 학생은 자기보고검사 일부를 완성하지 못한 채 나의 연락처가 적힌 명함을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서 완성하여 사진으로 전송해 주기로 하고서.

사실, 병원에 찾아오는 아동, 청소년들은 각각의 주호소와 사연을 지니고 있지만, 아주 본질을 파고 들면 공통적으로 그들 사이에 맞닿게 되는 접점이 있다 생각한다. 나의 대학원 교수님은 그것을 '통찰' '대처양식' 여부를 가지고 설명하시기도 했는데, 다양한 심리적 문제의 원인이 되는 그것. 스스로에 대한 알아차림이 있느냐, 그리고  이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대책과 자신만의 노하우가 있느냐. 이건 인간이 아주 적응적으로 살아가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함에 있어 상당히 핵심적이고도 본질적인 요소가 된다 생각해 고, 최근 다양한 소아 청소년들의 심리적 문제들을 접하면서  생각은 더욱 확고해지는 중에 있다. 오늘 만났던  학생은 통찰과 대처양식  대처양식이 빈약하다 못해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는...그래서 번아웃되었고 스스로 어찌할  모르는 상태로 있는, 안타까운 학생이었다. 아버지는 의사, 어머니는 간호사, 친구같은 가족관계, 가족에게 바라는 점이 없다고  만큼의 원만하고 평탄하였을 16년의 인생을 감히 단정지을  없지만, 4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아이에게서 얻은 가장  인상  하나는 '어찌할  모름' 이었다.  왜냐하면,  아이에게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자잘한 스트레스는 있었을지언정, 인생을 송투리  흔들만한 크나큰 사건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략적인 히스토리는 이러하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본인 스스로도 그렇고, 집에서도 그렇고, 학업에 대한 부담과 스트레스를 주는 존재가 전혀 없었지만, 내신 관리가 어려운 고등학교로 진학을 함과 동시에 학업 열정이 불타오르면서 한동안 상위권 성적도 유지하고 수면시간도 줄여가는 열의를 보였었다. 하지만 결과는 학생의 노력을 몰라주었고, 아이는 초조해지기 시작했고, 점점  무력해져 갔다. 그리고 학교를 떠나 버렸다. 시간은 흐르지만 무력감은 아이를 잡아먹은 채로, 아이는 잠식되고, 압도 당했다.




스트레스에 대한 내성, 좌절 인내력, 이것이 정말 부족하다 못해 아예 없어 보이는 아이들을 간혹 만나게 된다. 그래도, 설마, 이정도로 없다고? 싶을 정도의, 내성이 빈약하고 단단함이 결여된 안타까운 영혼들이다. 내가 그들의 손을 잡아줄 방법은 없고, 대신 그 역할은 당연히 부모가 해 주어야 하는데. 더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런 유약한 심성을 지닌 아이들의 부모는 대부분 자신의 자녀들을 스트레스 상황에 노출 시키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쓴다는 점이다. 그것이 의지에 의했든, 무의식적으로 그리 행하든, 그것은 그들의 인생 철학이기도 할 것이니 왈가왈부하는 게 선 넘는 행동일수도 있겠지만. 자녀의 자율성을 확보한다는 명분하에 어떤 압력도 가하지 않는 것... 매사에 '괜찮아' 로만 일관하는 삶이 정말 괜찮은 것일까, 라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것도 그럴것이, 오늘 검사했던 이 학생의 어머니는 너무 쿨했거든. 내년에 고등학교 재입학을 준비하는 아이에게 '복학 못 해도 괜찮다, 다른 방법이 있으니까'라고 말하는 것, 사실은 너무나도 이상적이고도 어떤 부분에선 바람직해 보이는 태도이다. 하지만, 때로는 아이의 기질과 성격에 맞게, '안 괜찮기도' 해야 하는데, 아이는 잘하고 싶어서 발버둥 치고, 못하는게 너무 겁나고 속상하고, 점점 위축되어가는 상황에서 '괜찮아. 못해도 괜찮아'라고 하는것이 과연 정말 괜찮은 것일까..못하는 게 괜찮지 않은 아이더러 못해도 괜찮다니...

이럴 때를 대비하여 필요한 것은 스트레스다. 아이에게 피할 길만 알려주는 게 아니라, 돌파할 방법을, 돌파할 힘들 주는 것이 스트레스인 것이다. 다른 말로는 성취압력,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다. 이 성취압력이란 건 사실 양날의 검과도 같아서 정말 아슬아슬 줄타기를 잘해야 하는 성질의 것이기도 하겠다. 너무 없으면 스트레스에 잡아먹히는 순한 양이 되어 버리고, 너무 과하면서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불똥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건강한 자녀로 키운다는 목적은 다소 왜곡되고 변질되어 왔고, '건강함'이라는 것은 '스트레스에 적절히 견디고 대처하는 능력'이 아닌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상태'로 오인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이를 물가에 절대 내 놓지 않으려 꽁꽁 싸매고, 업고 다니고, 혹시라도 스트레스에 휘둘릴까 노심초사 하며, 아이들 스스로 단단해질 수 있는 기회 자체를 박탈시켜 버린 거 같다, 라는 생각. 물에 발을 담궈 봐야 물이 차갑구나, 물이 깊구나, 함부로 들어가지 말아야겠다, 라는 다짐도, 물이 깊으니 수영을 배워야 겠다, 라는 계획도 세울 수 있다. 우리를 적응적인 존재로 만드는데 '대처양식'은 없어서는 안되는 핵-핵심인데, 그것을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스트레스가 필요한 것이다.




매우 주관적인 사견으로는, 오늘 그 아이가 내년에는 꼭 학교를 다시 다녔으면 좋겠다, 그래서 스스로 '정말 괜찮음'을 찐으로 경험해 보는 기회가 주어지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잔뜩 했다. 기억에 남는 아이들이 있다. 지금은 잘 지낼까 궁금하기도 하고, 지금은 괜찮기를 바라게 되는 서사 가득한 아이들. 같은 물에 빠져도, 두 번 째 빠졌을 땐 '수건으로 발을 닦자'고 생각하던, '온 몸이 안 빠지길 다행이다'라며 안도하던, 자기만의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이겨가는 아이들로 자라나길 바라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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