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의
그리고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중략>
- 정현종, <방문객> 중에서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란 시의 일부다. 나는 최근 까맣게 잊고 지냈던 한 사람과의 관계를 맺으면서 시인의 <방문객>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의 시 속에 녹아있는 적지 않은 관계의 무게감에 압도된 듯한 중압감을 느낀다.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라고 말한 시인의 말처럼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일생만 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몸담았던 한 시대의 역사와 문화까지 함께 오는 것이기에 어마어마한 일이 라고 하지 않았을까? 이 시를 읽으면서 내가 지금 어떤 사람을 만나고 있는지, 주위에 어떤 사람이 있는지를 한번 더 생각해 본다. 또한 나를 찾아온 사람은 시시한 사람이 아닌 정말 멋진 사람이라는 느낌이 든다. 누군가 나의 인생 전부를 이해해 주고받아 준다면 나 또한 내게 온 그의 일생을 존중하고 소중히 환대할 것이라는 생각 앞에 선다.
며칠 전 저녁녘, 가을 길을 걸어서 대실역 방향으로 갔다. 오늘은 그와 스타벅스 뒷길 ‘이동근 선산곱창’에서 술 한잔하기로 약속한 날이다. 약속 시간보다 10분 정도 일찍 도착해서 식당 안으로 들어가니 내가 첫 손님이었다. 첫 손님이란 어쩌면 행운의 부적 같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좋은 기분으로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식당 내부를 돌아보다 메뉴판을 보니, 이외로 다양한 메뉴가 눈길을 끌었다.
종업원이 몇 가지 기본 반찬을 식탁 위에 놓고 갔다. 나는 아직 약속한 시간이 남아 있어 아이폰을 꺼내 들고 브런치 앱에 들어가 ‘작가의 서랍’ 속에 넣어 둔 내 글을 읽어 본다. 부제는 '좀♬노는 화분과 발랑 까진 사과 씨의 Love♥Story’. 기발한 발상이 돋보이는 이 말은 그가 보낸 짧은 메모에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던 글이다. 나의 서랍 속의 글은 이 메모를 통해 발상한 동화 같은 감성을 실어 쓴 미완의 작품이다.
글을 읽으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문장에 대해 수정 작업을 하는 중 그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약속 시간보다 10여 분이 지난 시간이다. 그는 술 한잔한다고 승용차를 집에 두고 택시를 타고 왔는데 퇴근 시간과 맞물려서인지 도로가 복잡해서 조금 늦었다며 살짝 미소를 덤으로 보내며 자리에 앉았다. 활달한 표정과 당당한 그 모습이 좋았다. 우리는 먼저 선산곱창전골 2인분과 소맥을 주문했다. 뜨끈한 국물과 얼큰한 게 술안주로는 제격이라는 그의 말이 입맛에 와닿았다. 먹고 남은 국물엔 육수를 넣고 라면 사리를 끓여 먹으면 저녁 식사까지 해결되는 완벽한 조합이라는 생각과 함께.
얼큰하게 끓는 곱창전골과 소맥을 마시면서 우리는 서로의 일생을 나누어 선물처럼 주고받았다. 사실 두 번 만나서 함께 술 한잔하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서로에 대한 좋은 감정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한다. 새로운 사람을 안다는 건 그 사람의 일생이 내게로 온 것이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일임엔 틀림없다. 나에게도 그에게도. 왜냐하면 그의 단면 너머에 숨어있는 크고 작은 일과 그 사람의 배경과 삶의 갖가지 사연이 함께 걸어와 나와 마주하는 것이니까.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 심지어 미래까지 안고 내 앞에 선 것이니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인가?
내가 그와의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살아온 세계와 관계를 맺는 일이다. 서로가 살아온 삶의 세계가 다르겠지만, 각자가 걸어온 삶의 세계를 주고받으면서 또 다른 삶의 세계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떨리는 행운이며 진정한 용기가 필요한 일 아닐까? 현재 나의 앞에 앉아있는 그의 모습뿐 아니라 그의 과거와 미래를 함께 끌어안게 되는 일이니까. 이 얼마나 소중하고 가슴 설레는 일인가.
소중한 만남을 통해 맺게 되는 사람과의 관계는 서로에게 많은 변화를 불러올 수도 있다. 그러나 주고받는 대화 속엔 상대에 대한 존중과 믿음이 깔린 진심이 있어야 한다. 상대가 알아채고 이해해 줄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어려운 상형문자를 해독하듯 망설이지 말고 용기를 내어 내 마음을 먼저 말해주자. 삶은 우리가 작곡하고 연주하는 혼자만의 콘서트와 같은 것이니까. 서로에 대한 배려와 진실한 대화를 통해 신뢰를 쌓아가다 보면 자연스레 한마음이 되는 것 아닐까? 꽃처럼 살면 꽃이 되고, 별처럼 살면 별이 되듯이.
우리는 가볍게 술을 마시고 나와 골목길 건너에 있는 스타벅스로 갔다. 시계는 오후 8시를 알리고 있었다. 우린 벽 쪽으로 자리를 잡고 앉아 그가 주문해 온 커피를 마시면서 또다시 일생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삶 속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마냥 즐거운 맘으로 들어주었다. 내가 그에게 관심을 갖는 만큼 공감의 범위도 넓어질 것이다.
비록 살아온 배경이 다르더라도, 나이 차이가 나더라도 그에게 매혹을 느낀다는 것은 내 마음의 문이 열렸다는 것이다. 가끔은 술 한잔을 마시며 마음속에 숨겨두었던 솔직한 나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의 과거와 흔치 않은 일상의 이야기를 신이 나서 들어줄 것이다. 서로가 숨겨 둔 내면의 삶을 숨김없이 열어 다가갈 때 진정한 일생과 마주하게 될 것이니까.
우리의 인연이 좋은 인연이 될 수 있게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주고 고마운 사람, 진실하고 따뜻한 사람이 되어주자. 그리고 그의 생각과 경험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자. 그가 나의 외로움이 아닌 그리움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가끔 만나도 늘 만나며 지내는 사이처럼 환한 미소로 기쁨을 선사하며 함께 즐거워하는 관계였으면 좋겠다. 오늘따라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나는 창문을 조금 열고 겨울을 재촉하는 빗소리를 들으며 아메리카노 한잔에 마음을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