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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팍크 May 15. 2024

2호. 수필에 관하여


내가 쓰는 글이 일기와 수필 어드매를 왔다 갔다 하는 요즘. 과연 수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문헌 기반은 아니고 구글링을 통한 결과이지만 많은 사람이 동일하게 증언해주는 것으로 보아 설득력 있지 않은가 싶은 '수필'의 원조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해 보겠다. 동양에서는 중국 남송 홍매의 '용재수필, 우리나라에서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일신수필이라는 말로 등장한다. 서양의 기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양지만 가장 널리 받아들여진 기원은 프랑스 몽테뉴의 '수상록'이다. 수필 역시 여러 형식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몽테뉴형의 예술적 철저한 주관적 사색형의 수필과, 베이컨형의 논리와 객관을 기반으로 한 수필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수필의 기원과 역사를 둘러보았을 때, 결국 관통하는 개념은 '무리하지 않고, 뜻이 가는 대로 자유로이 나를 표현하는 방식'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일까, 오히려 수필은 어려운 구석이 있다. '자유'가 주는 어려운 면이 있다. 형식이 있다면 그에 맞춰 쓰면 그만이다. 잘 썼건 못 썼건 형식 하나를 지켰다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글로써 인정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수필은 형식을 다 걷어내고서 그 속에서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픈지 들어보겠다는 것 아닌가. 이것 참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다.


수필은 '나'를 팔아먹고서 쓰는 글일까? 계속해서 쓰면 나의 밑천이 드러날까? 나의 일상은 정해져 있고, 느끼는 바도 얼추 비슷하다. 어떤 순간은 아름답고 어떤 순간은 슬프고. 내 일상에서 단순 일기를 넘어선 수필로 남길만한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일까? 얼마 전 유튜브 채널 '십오야'에 나온 손석구 배우의 짤을 본 적이 있다. 그곳에서 손석구는 이병헌을 찾아간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내 밑천이 드러나는 것 같은 겁니다.


내가 쓴 글을 공개하려고 마음먹은 요즘. 고작 글 2개 공개한 셈 치고는 너무 이른 고민이지만, 문득 궁금해진다. 수필은 나를 야금야금 팔아서 밑천을 드러내게 하는 글일까. 아니면 나도 몰랐던 내 속의 화수분을 발굴해 내는 일일까.


한 가지 확실한 건 다른 사람들에게 나에 대해 무방비 상태로 드러내는 것임에는 틀림없다는 것이다. 내가 수필을 쌓으면 쌓을수록, 사람들은 나와 나의 사고방식에 대해서 알게 되겠지. 나의 일자무식함에 대해서도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겠지. 조금 벌거벗은 느낌이 드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세상은 너무 겹겹이 싸매고 사니까. 어떤 방식으로는 벌거벗는 것도 괜찮다는, 그런 마음이다.


궁금하다. 내가 10편이고 100편이고 이런 글을 계속 써나갈 수 있을까. 100편이 넘어가면 나도 모르는 나를 읽어내게 되겠지. 모호한 상태로 방치해 두었던 나의 느낌과 나의 생각을 좀 더 또렷하게 만들 수 있으려나. 얼마 전 읽었던 책에 이런 말이 있었다.


젊은 날에는 시를 쓰고, 산문은 나이가 들어서야 나오는 것이라고.


나도 나이가 조금 더 들면 내 글에 -일까?가 아니라 -이었다. 라고 마무리 할 수 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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