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몸에 숨겨진 도상들 / 두 눈의 다른 시선/ 왼손과 45도의 비밀
Raphael. 1509-1511. 38.9 × 32.9 cm. The Natonal Gallery. London.
이 글을 쓰기 시작하자 오래전에 히드로 공항Heathrow Airport에 내려 전철을 통해 미술관 근처에 내렸던 순간이 떠오르고, 캐리어를 끌고서 울퉁불퉁한 돌로 박힌 거리를 올라가며 내셔널 갤러리로 향했던 순간이 기억난다. 손에 잡히지도 않는 생각이나 마음이 얼마나 신기한지! 수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져 가슴이 뛰니 말이다.
갤러리 안으로 들어갔을 때 맡았던 중세 명작으로부터 나온 듯한 조금은 쿰쿰했던 냄새를 되새기며, 명화 앞에 서실 관객들을 위해 좀 더 깊은 작품 분석과 작품 속 내용을 전해 드리려 한다.
화가가 제작한 화폭 속의 1mm 선이나 색은 의미없이 그려진 것은 없다. 화폭 속의 모든 것에는 화가의 메세지와 배경 되는 내용이 담겨있다. 필자의 작업은 그림 속 내용을 온전히 분석해 전하는 것이다. 그 동안 시행해 보지 않았던 정교한 내용 분석과 설명을 위해 작품 속에 수술용 메스를 들이대어 본다. 이 글쓰기 시작으로 명화 해부학의 시작이 되길 소원하며 글을 쓴다.
참고로 이곳에서 언급되는 내용은 이미 연구된 것도 있지만 미술사 최초로 해석되어 설명 드리는 것이 있으며 특히 처음으로 발견한 여러 신기한 도상들이 있음을 알려드린다. 글재주는 없지만 발견된 도상은 귀한 것이니 작품 앞에 서실 때 작으나마 도움이 될 것 같다. 주제 되는 단어별로 진행한다.
분수대에서 바라본 미술관 정면이다. 역사적 장소지만 현재는 휴식과 만남의 장소로 사용되는 트라팔가 광장Trafalgar Square과 함께하는 근대풍의 건축물로 고전적인 느낌을 지니고 있다.
대영 박물관과 함께 영국 최대의 미술관 중 하나로1824년에 설립되었고, 수장품의 범위는 시대적으로 초기 르네상스에서 19세기 후반에 이르고, 영국뿐만 아니라 각국의 명작품을 골고루 수장하고 있다. 계단을 올라 왼쪽으로 들어가면 그림 속 중세 시대로 들어선다.
미술관에서 제공하는 지도를 참고하고 라파엘로의 여러 그림이 있는 26번 방으로 가면 된다.
먼저 화가에 대해 알아보자. 너무나 유명하지만 처음 대하시는 분들에게는 도움이 될 것 같다. 라파엘로(Raffaello Santi)의 아버지 조반니 산티(Giovanni Santi)는 궁정 화가였다. 이탈리아 마르케 지방의 우르비노에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그곳에서 훈련을 시작했으며 타고난 천재성으로 조형과, 감정, 빛, 공간표현 등의 회화적 기초를 두루 연마한 것으로 추측한다. 지역과 인맥의 특성상 만테냐, 우첼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작품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도 추측한다.
그의 초기 그림은 페루지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며 홀로서기에 성공한 그는 1504년 당시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있는 피렌체로 이주하였고, 이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화폭의 특이성을 습득해 자신만의 것으로 재창조할 수 있었던 것으로 미술사학자들은 추측한다. 다른 여러 화가들의 특별한 화풍을 습득해 자신 만의 것으로 재창조하는 재능을 라파엘로의 가장 특별한 재능으로 꼽기도 한다.
피렌체에서 활약한 그의 명성으로 인해 1508년 25세의 젊은 나이에 교황 율리우스 2세의 궁정에 부름을 받아 로마 교황의 거처를 재 장식하는 일을 돕기도 했다. 바로 곁에서는 시스틴 성당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천지창조를 제작하던 시기와 맞물려 있던 기간이다. 이것으로도 그의 명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남은 생애 동안 로마에 머물렀고 1514년 브라만테가 죽자 성 베드로 성당을 담당하는 건축가로도 임명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그가 37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해 더 큰 대작을 남기지 못한 점이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추기경 레오 10세는 라파엘로를 애도하면서 국가장을 치르게 했다. 라파엘로의 시신은 로마의 판테온에 묻혀 있다.
그의 모든 작품에는 인물과 색채, 색조의 부드러움과 조화로움이 기하학적인 구성 속에 담겨 있어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계를 마찰 없이 연결하며 더 나은 이상향을 향하는 부드러움을 지닌 긍정적 세계관이 담겨있다는 평가다.
참고로 이 작품에서 담고 있는 메시지는 신에 관한 이야기로서 인간을 위해 희생된 하나님 자신을 그렸다. 상당히 긴 내용이지만 최초로 공개되는 도상과 해석이 있으니 끝까지 경주하시길 바란다.
관객이 작품을 대하면 첫인상이랄까? 아니면 특이한 분위기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작품에 마음이 당기게 하는 순간으로서 그림이 관객에게 픽업되는 찰나이기도 하다. 그런 특징이 이 작품에서도 강하게 느껴진다.
보통은 2차원의 평면에 그린 것이며 벽에 딱하니 붙어있어 재미없으며 특히 운동성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럭비는 뛰고 부딪히며 땀이 튀는 경쟁력이 있고, 피아노는 영혼을 담아 손가락을 움직이기도 하는데... ...하며 그림을 마치 양념 하나 없이 구워진 텁텁한 빵으로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이 작품을 바라보면 조용한 가운데서 무엇인가를 행하는 움직임이 감지된다. 뭐뭐 하는 중이라는 의미로 '...ing'라고 적고 싶다.
세례 요한은 왼손으로 꽃을 전하고 있고, 예수는 오른손을 뻗어 꽃을 전해 받는 중이다. 이를 마리아가 내려다보고 있는 중이며 현재 대 저택이나 성에 있는 로지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중이다. 조금 더 나가면 배경으로 등장해 있는 마을에는 당시 현지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중이며 하늘에 둥둥 떠있는 구름들은 바람이 안내하는 대로 흘러가는 중이다. 정지된 상태가 아니며 뭔가를 하는 중이다....... ing다.
뭐뭐 하는 중이라는 이 그림 속 특징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며 이 작품의 핵심 메세지를 읽어 내는데 결정적 단서가 된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들은 글을 마치는 순간 때까지... ing를 기억하시면 좋겠다.
구도는 그림의 뼈대로서 작품의 구조를 깨닫게 하며 빠르게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한다. 관객이 작품 앞에 서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관찰 중의 하나이다.
“석조 회랑 난간의 노란 선이 수평을 이루며 상하를 나누며 동시에 건물의 안과 밖을 나누는 역할을 한다.
중앙의 청색 점선은 좌우 대칭을 이룬다. 마리아의 얼굴 중앙을 지나 예수와 세례 요한의 손을 지난다. 이 선 속에 예수의 미래를 상징하는 붉은색 카네이션이 들어 있다. 십자가 사건을 알리며 작품의 가장 중요한 도상이 담긴 선이다.”
“인물들의 삼각형 구도는 안정감과 견고한 느낌을 전한다다. 다른 이유도 있지만 이 삼각형 구도의 매끈함을 위해 마리아의 다리를 천 안으로 넣었다. 다리가 보이지 않아 이상하지만 보기에는 깔끔하다.”
“회랑의 석조 기둥이 수직으로 화폭을 3등분한다. 이들 두 점선 속에 아기 예수와 세례 요한의 몸이 들어가 있고, 그 중심에 마리아가 들어 있다.”
“양쪽의 대각선 역시 정 중앙에서 만나는데 두 아이들의 손과 붉은 꽃이 있다. 붉은 선의 도형도 보인다. 예수의 왼발과 마리아의 오른손이 이 선 속에 들어 있어 선을 형성한다.”
“정 중앙의 선을 기준으로 좌우의 풍경과 인물과 기둥과 선이 서로 마주한다.”
이 작품의 제목이 신기하다. 마리아를 뜻하는 마돈나 앞에 Garvagh란 단어가 붙어있다. 분명 고유명사라 설명을 듣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올바른 중세 그림의 감상을 위해, 때로는 작은 지식이 필요한 경우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제목에 대한 이해다. 인간으로 치자면 살아온 삶이나 인생의 내력이 작품의 제목에 들어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림에 관한 소유권이 담긴 역사이기도 하다.
제목 “The Garvagh Madonna”의 가바(Garvagh)는 북아일랜드에 위치한 지명이기도 하고 약 55년간 이 그림을 소유했던 가바 부부의 이름이기도 하다. 만약 중세 때 한국의 현대 미술관에서 이 작품을 사서 오랫동안 지니고 있었다면 “현대 마돈나”란 제목이 된다. 이렇게 중세 미술에서는 작품과 관련된 지명이나 이름 등이 제목에 들어있는 경우가 있다.
참고로 내셔널 갤러리의 작품 안내에 따르면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많은 당시 작품을 소유한 귀족층들이 빼앗기기 전에 예술품을 내다 팔았는데, 그 때 이 작품이 스코트랜드의 ‘Garvagh Collection’로 팔렸다고 한다. “The Garvagh Madonna” 또는 Aldobrandini Madonna(알도브란디니 마돈나)로도 알려져 있다.
2023년 한국에서 전시될 때의 작품 명이 <성모자와 세례 요한>인데, 이렇게 부르기도 하지만 원제목은 아닌 셈이다. <성모자와 세례 요한>이란 제목이 너무나 많아 어느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인지 인식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중세 회화에서 작품의 크는 간혹 그 용도를 알려준다. 일단 큰 규모의 그림은 제단화 이거나 교회 건축물에 전시를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부유한 집의 거실을 장식할 목적일 수 있다.
이 작품은 크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82.9Cm X 89.9Cm) 개인이 소장할 목적으로 제작 의뢰된 것으로 추측한다. 제작된 시기는 1509에서 1511년 사이로 알려지고 의뢰인은 알 수 없다.
성경적 내용의 작은 작품을 개인이 소장하는 목적은 대부분 기도 때 사용하는 것이다. 큰 작품에 비해 비용이 적겠지만, 중세에 그림을 의뢰하는 것은 일반인으로서는 만질 수 없는 값비싼 비용을 주어야 하기에 일단 부자이면서 신앙이 좋은 의뢰인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지금은 일반인들이 관람하는 공개된 전시장에서 이 작품을 대하지만, 중세 한 때에는 한 특별한 개인과 가정만이 이 작품을 보며 기도를 드렸던 것을 상기해 보면 좋겠다.
특별하지 않은 자잘한 얘기들이지만 이런 것을 숙지하고 작품 앞에 서면 좀 더 특별한 친근감이 함께하게 되어 작품에 애착을 갖게 한다. 이제 어머니 마리아를 만나보자.
마리아의 얼굴만을 확대해 바라보면 라파엘로의 천재성이 드러난다. 물감으로 표현되었지만 피부의 톤과 감촉이 실제처럼 느낄 수 있으며 근심스러우면서도 미소 짓는듯한 표정은 압권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적 인물 중에, 많이 알고 있는 듯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인물이 있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어머니 마리아가 아닌가 싶다.
마리아는 성경 신약 초기에 등장했다가 곧 성경 기록에서 사라진다. 또 오래 전인 창세기와 구약 이사야서에서부터 탄생이 예언되었던 신비의 여성이기도 하다. 창세기 에덴동산에서부터 신약까지이니 인류 중에 예수님을 제외하고 가장 긴 기간 동안 예언되었던 인물이 이 마리아이다. 그렇지만 이 마리아에 대한 가장 위대한 기록은 모든 인류 중에 단 한 사람, 성령 잉태를 경험한 여인이며 창세기에서 언급한 “여인의 후손”을 낳을 것이란 예언을 감당한 당사자이다. 그녀의 신앙 또한 12제자들 못지않다.
그림 속의 지금 이 모습은 아기를 낳아 기르는 과정의 한 순간을 화가의 상상력에 의해 구성한 것이다. 어머니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친족인 세례 요한을 곁에 두고 있다. 평안한 모습이며 넉넉한 엄마의 자리가 느껴지는 순간으로 단란한 가정의 한 단면을 연출하고 있다.
그런데, 분위기를 보면 활기찬 웃음이 터져 나와야 할 텐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마리아 얼굴의 표정에서 지극히 절제된 정적인 분위기가 감지된다. 차분하지만 무겁다. 이것은 성가족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예언적 표현으로서 아기 예수와 세례 요한의 미래에 있을 죽음 때문에 얼굴에 무거움이 스며있는 것이다.
이 작품의 구성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45도 각도로 틀어진 마리아의 몸이다. 관객은 마리아 몸에 대해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중세 회화에서 인물들의 몸은 여러 가지 상징을 지니고 있다.
마리아의 몸이 정면을 향하고 있지 않아 관객 입장에서는 부담감이 없다. 그러나 이런 구성의 결과로 마리아의 머리가 몸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듯한 부자유스러움이 감지된다.
목을 보면 기이하게 꺾어 얼굴을 돌렸다. 마치 학교에서 미술 시간에 사용했던 석고상을 보는 듯하다. 이런 모습을 관찰해서 찾았다면 왜 화가가 이렇게 묘사했을까 하는 의문을 스스로 제기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목이 틀어졌네 하지 말고 왜 화가는 목을 이렇게 묘사했을까 하는 질문을 하면 좋겠다.
왜 그런가 하면, 이 화가는 인체에 관해서는 무리하지 않고 부드럽고 아름답게 묘사하는데 타의 추종을 불허한 중세 대가이기 때문이다. 여러 화가 중에서도 르네상스 3대 회화 거장으로 불린다. 그런데도 이렇게 무리해서 묘사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이 45도 각도에 대한 정밀한 분석은 이 글 마지막 부분에 가서야 그 이유가 벗겨진다.
어머니 마리아의 두 눈에 도상의 비밀이 담겨있다.
어머니 마리아 눈 안의 검은색 수정체 각도를 잘 살펴보면 시선의 방향이 분명히 다르다. 이 시선을 따라가 머무는 끝을 보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오른쪽 눈은 아래 붉은 꽃을 향하고 있어 십자가의 피를 상징하며, 왼쪽 눈은 세례 요한 쪽을 향하고 있는데 몸에 걸친 나무 십자가를 향하고 있어 이 역시 십자가 처형을 상징한다.
현재, 자신의 몸에서 놀고 있는 아기 예수가 산제물로서의 죽음을 향하고 있음을 알리는 두 시선이다. 작은 규격의 작품이라 전시장에서 보면 잘 보이지 않는다. 드러나지 않게 묘사하려고 한 흔적이 보이는데 화가의 창의성이 뛰어난 도상이다.
만약 왼쪽 눈의 시선이 세례 요한을 향하고 있다고 해도 두 자녀 모두 의로운 죽음을 맞이하는 공통점이 있다. 세례 요한은 쟁반에 머리가 올려지기 위해 참수당했고, 아기 예수는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다. 거룩한 죽음이 두 인물의 공통분모이다.
현재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서 평화로운 분위기이지만 다소 무거운 얼굴로 묘사한 이유이다.
마리아의 두 손을 보면 왼손과 오른손이 다른 형상이다. 왼손은 세례 요한의 털 옷을 살며시 올려 쥐면서 세례 요한을 안고 있는 동작이 들어 있고, 오른손은 아기 예수를 덮을 청색 천을 한 움큼 쥐고 있다. 쥐기도 하고 펴기도 한 모습이다.
중세 명화 속에는 이렇게 두 손을 활용해 화가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화법이 있다. 대표적인 두 손은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에 있는 아버지의 손이다.
그럼, 여기서는 두 다른 손이 어떤 상징을 지니고 있을까? 이 작품의 경우, 하나님으로 해석을 확대하기보다는 마리아에게 한정시켜 해석하는 것이 좋다. 이런 표현은 어쩌면 우리 엄마 같은 평범한 어머니로서의 마리아와 예수라는 특별한 아이의 어머니로서의 두 삶을 살아야 했던 마리아의 두 다른 모습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렇지만 이 표현이 마리아의 신성을 강조하는 중세 시대에 제작된 작품이니 만큼, 당시 종교적 성향에 따른 마리아의 신성적 해석일 수도 있다고 본다. 신이신 아기 예수를 낳은 것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체험했던 여인이었기에 공경의 대상으로 삼아 이런 표현과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리아의 신적 능력의 표현으로 해석해 보면, 왼손으로는 사람을 모으기도 하고 상처받은 마음을 다독 그리기도 하며 오른손으로는 그런 사람의 마음을 잡아 흔들리지 않게 하는 넓은 만인의 어머니로서의 도상이라고 생각한다. 신도 품고, 사람도 품는 만인의 어머니 형상으로 해석해 본다.
그래서일까, 전체 그림에서 보면 마리아가 중앙에 위치해 있고 아기 예수가 한쪽으로 살짝 비켜있는 구성이다.
마리아 얼굴과 머리를 보면 앳된 나이가 느껴지며, 단정하게 준비해 화가 앞에 앉은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꼭 다문 입술과 오뚝 솟은 콧날은 곧, 자식을 잃을 그녀의 삶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인지 뭔가를 끝까지 지켜내려는 의지가 엿보이며, 정 중앙의 가르마는 좌우 쳐다보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했던 그녀가 걸어간 반듯한 신앙의 길을 보는 듯하다.
꾸미지 않은 머리 결 위로 단정하게 묶어 올린 머리 위의 터번으로 시선을 옮겨보자. 실물처럼 손에 천의 느낌이 잡힌다. 검소한 마리아를 묘사했지만 여인인지라 머리 부분에 장식을 넣었다. 작품이 제작될 당시의 유행하던 여성들의 터번이다.
이 작품 전체에 사용된 주된 색은 청색이다. 전체 속에서 색의 조화를 염두에 둔 활용으로 이 터번 속에도 청색을 넣었다. 이와 함께 녹색과 중간 마디마다 있는 금색 실 줄도 보인다.
청색의 보강색처럼 활용된 녹색을 함께 사용해 조화를 이루며 튀지 않게 마리아의 얼굴 표정을 잘 뒤받침한다. 이 녹색은 회랑 밖에 보이는 건물에도 들어 있어 이질적인 느낌 없이 안과 밖에서 조화를 이루는 색의 활용이다.
이 터번에서 색을 논할 때, 중간에서 마디 역할을 하는 금색이 눈에 띈다. 가늘고 작은 부분이지만 효과에서 만큼은 큰 역할을 감당한다. 실제로 금을 사용해 만든 금실인데, 후광에도 쓰이고 그녀의 상의 어깨 부분에도 사용되었다. 가느다란 이 금실은 그녀를 여인으로서 최대한 높이는 장치 중의 하나이다.
이번에는 그림의 주인공인 아기 예수께로 다가가 보자. 화가는 이 아기 예수에게 일반인들이 볼 수 없는 특별한 상징을 심어 놓았다. 신으로서 인간의 형상으로 이 땅에 찾아오신 아기 예수님을 화가는 어떤 식으로 도상화해 놓았을까?
아기 예수를 분석하거나 이해하기 위해 그림을 쳐다보시기 전에 아주 특별한 한 성경 구절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이 구절의 이해가 없으면 그림의 배경에 마음이 닿질 않는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세기 3:15)
인류가 단어를 만든 것 중에, 가장 신비한 단어의 조합이 들어 있는 구절이다. 여인의 후손이다. 모든 인류는 남자의 씨를 가진 남자의 후손이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있을 수 없다. 첫 사람 아담과 이브의 부부 이후에 태어난 모든 인류는 남자의 씨를 가진 인류다.
그런데 단 한 사람, 남자와 육체적 결합이 없이 태어난 여인의 후손이 그림 속의 아기 예수다. 일반적인 남녀의 결혼으로 태어난 아이가 아님을 먼저 알아야 한다. 이 아기 예수가 현재 이곳에 있게 된 연유가 창세기에서 하신 구절 속의 약속에 따른 이행이다. 짧게나마 아기 예수의 출현에 대한 배경을 이해하셨으면 이제 그림 속으로 들어가 보자.
창세기에 예언된 여자의 후손인 하나님 당사자가 지금 마리아의 품에 있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 아기 예수의 가장 큰 정체성이 완전한 인간이며 동시에 완전한 신이신데, 인성과 신성의 흔적을 이곳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화가는 교묘하게 그 상징들을 그림 속에 묘사해 놓았다. 이 부분 역시 처음으로 공개되는 상징적 해석일 것 같다.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들만이 그림 앞에 서실 때 해석하실 수 있고 왜 화가가 예수의 왼손을 그림에서처럼 표현했는지를 알 수 있으실 것이다.
우선, 인간의 상징인 인성부터 찾아보자.
가장 큰 인성의 흔적은 어머니와 배꼽이다. 어머니 마리아의 탯줄로 생명을 유지했음을 알 수 있고,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났음을 배꼽으로 확인할 수 있다. 생물학적 증거인 셈이다.
또 하나의 증거는 사회 구성원의 일원으로서의 증거이다. 곁에 있는 사촌 세례 요한의 등장은 성경 기록대로 친족임을 알리는 인성의 흔적으로서, 혈족에 따른 인간계의 족보를 지니고 있음을 증거 한다.
신성 부분은 어떻게 묘사했을까?
우선 후광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선포한다. 마리아와 세례 요한의 후광과 달리 아기 예수의 후광 안에는 삼위일체의 상징인 세 개의 선이 들어 있다.
또 하나의 신성적 상징은 붉은 꽃을 받은 오른손과 마리아 배에 대고 있는 왼 손바닥 그리고 왼팔에 담겨있다. 특히 왼팔에 희귀 도상이 담겨있다. 일반인들이 찾기 어려운 상징으로서 고차원적인 도상적 표현이다. 배경인 성경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발견하기 어렵다.
아기 예수가 어머니 품에 있으면서 왼팔을 뻗어 분명하게 배에 손바닥을 대고 있다. 이 회화적 표현을 글로서 풀어내면 다음과 같다.
위에서 읽어드렸던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대로 “여인의 후손”으로 성령으로 잉태되어, 처녀인 마리아에게서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난 사람이 바로 나라는 뜻이다. 왼팔을 마리아의 배에 대고 있는 의미이다.
손바닥과 조금 다르게 왼 팔 또한 특별한 상징을 담았다. 왼 손바닥의 연장선에서 해석되는 팔이 탯줄이 되는 구성이다. 신기하죠?
이 상징적 의미 역시 “내가 스스로 예언대로 이 마리아 배에서 태어났다”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신이신 창조주 아기 예수님이 관객인 피조물 인간에게 성경 기록의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다.
중세 기독교 명화 속에는 이 같은 교묘한 도상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 제가 여러분에게 드릴 수 있는 선물로서 앞으로 계속 전달해 드릴 것이다.
이 부분을 해석했다면, 왜 화가가 마리아의 몸을 45도로 틀어서 몸을 구성했는지 알 수 있다. 45도 각도일 때 마리아의 두 손과 두 시선 그리고 아기 예수의 왼 팔을 가장 효과적으로 관객에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고개가 틀어져 어색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포즈를 취하게 됐는지를 알 수 있다.
화가의 구성력과 창의력이 정말 뛰어나지 않나요? 이래서 명화의 반열에 올려진 작품이며, 그림의 배경인 성경을 제대로 참고해 해석할 때, 그림 속의 도상을 찾을 수 있고 화가가 고생하며 몰래 심은 놓은 메시지를 읽어 낼 수 있다.
화가의 구성력과 창의력이 정말 뛰어나지 않나요? 이래서 명화의 반열에 올려진 작품이며, 그림의 배경인 성경을 제대로 참고해 해석할 때, 그림 속의 도상을 찾을 수 있고 화가가 고생하며 몰래 심은 놓은 메시지를 읽어 낼 수 있다.
아기 예수의 몸에서 드러나지 않는 도상을 좀 더 찾아보면 신성의 상징이 더 있다. 피 흘려 죽는 죽음의 상징인 붉은 꽃을 받는 부분과 세례 요한이 짊어진 나무 십자가이다. 이 묘사들은 성경 기록대로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고 이 사역을 위해 대신 죽는 것으로서 신성의 상징적 표현들이다.
이 붉은 꽃을 다르게 해석하는 것은 카네이션의 원어에서 추출해 신성한 사람으로 해석해 보는 것도 좋은 해석이며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실 분 또는 십자가의 형벌에서 오는 고통으로 해석하는 것도 좋은 해석이다.
이번에는 왼팔의 도상처럼 일반인들이 발견하기 어려운 표현을 살펴보자. 작품의 한 부분을 수평으로 잘라보면 보면 왼쪽 아기 예수 – 중앙의 붉은 꽃 – 오른쪽의 나무 십자가가 일직선 상에 놓여있다.
이 역시 화가의 구성으로서 예수의 십자가 처형으로 죽으심을 강조한다. 화폭에서 수직이나 수평, 대각선 등을 잘 살피셔야 하는 이유이다. 중세 회화에는 수수께끼가 곳곳에 숨어있다.
가운데 붉은 꽃!
세례 요한이 이 꽃을 준비해 아기 예수에게 전해주는 순간이다. 이 장면을 어머니 마리아가 쳐다보고 있다.
이 전환이란 주제는 붉은 꽃과 구분해서 살펴봐야 하는 부분으로서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의 메시지가 담겨있는 곳이며 성경 66권 전체가 함축된 표현이다.
이 도상적 의미를 먼저 해석하면, 세례 요한의 왼손은 구약 부분이며, 중앙의 붉은 카네이션은 신약과 구약의 중간으로서 십자가 사역의 등장을 상징하며, 아기 예수가 오른손을 뻗어 이 붉은 꽃을 잡는 것은 자신의 신약의 출발을 알리는 것이다.
예수가 손을 뻗어 붉은 꽃을 받는 상징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신약의 십자가 사역을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예수가 주관하신다는 의미이다. 이로서 세례 요한에 의해 구약 시대가 막을 내린다.
글자로 풀이하면 “구약에서 신약 시대로”라는 뜻이며, “율법 시대에서 구원의 은혜 시대”가 된다. 시대의 전환이다. 단순히 죽음을 기리는 붉은 꽃 한 송이가 아니며 단순히 귀여움을 보여주기 위해 세례 요한이 곁에 있는 것이 아니다. 더 깊고 넓은 성경 전체의 내용을 함축하기 위한 화가의 구성 장치다.
그런데 이 같이 중요한 장면이 어디서 이행되고 있나? 마리아의 몸 위에서 실행되고 있다. 이같이 마리아 몸의 배를 중심으로 이행되는 것은 마리아의 수태고지 사역을 강조한 상징도 들어 있다. 화가의 마음이 읽힌다.
결국 화가는 아기 예수와 세례 요한의 행동과 아기 예수의 팔을 통해 마리아의 수태고지를 보이고 관객이 창세기 에덴동산의 불순종 사건으로까지 들여다볼 수 있도록 인도하고 싶은 생각이다. 화가의 생각이다.
중세 화가가 그림을 구성할 때는 일반인이 상상하기 힘든 정밀한 구성을 해 놓고서 작품의 배경인 성경적 내용과 화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합해서 붓을 들어 색을 칠하기 시작한다.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명화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우리가 작품 앞에서 단순하게 아! 이 아기가 아기 예수구나, 아, 이 여인이 마리아고, 이 아이가 세례 요한이구나 하고는 그림을 떠나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작품에는 화가의 마음이나 생각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고민 역시 드러난다. 그래서 또 한 가지 살펴보는 주제는 예수의 성정체성의 회화적 표현이다. 인간인 화가에 의해 그려지는 신의 육체에 관한 주제다. 비록 인간이지만 신이신 예수의 몸에 대한 성적 표현이라는 민감한 주제에 관해 어떻게 고민했는지를 들여다보게 된다.
21세기에 사는 우리야 성에 관한 주제를 조심스럽게 다루는 것이 오히려 어색하지만, 종교권의 일정한 지침이 있었던 중세 때에는 공개적으로 다루기 쉽지 않은 주제였다.
그러나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인간이 창조 때 부여받은 원초적 예술적 표현성은 버릴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그래선지 중세 그림을 살펴보면 예수의 하체를 가리는 가림 옷을 최대한 내려 묘사한 작품들이 많다. 십자가 사건에서도 그렇고, 공생애 사역을 위해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의 묘사가 특히 그렇다.
이런 성에 관한 묘사 역시 인성의 상징이 되며 동시에 그 각각의 시점은 성경 기록대로 태어난 예언 속에 행해지기에 신성의 상징도 된다.
작품 속으로 눈을 돌려보면 관객은 당연히 아기 예수를 바라볼 것이다. 그런데, 이 주제에 관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숨겨져 있다.
세례 요한을 보면 마리아가 왼손을 사용해 낙타털 옷을 살짝 올려서 보여준다! 단순히 가볍게 안는 표현이 아니다. 세례 요한의 성정체성을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표현한 부분이다. 화가가 의도적으로 관객에게 전한 메시지다.
화가의 이런 표현으로 볼 때, 관객인 우리가 아이의 성별에 관해 관심을 갖는 것은 작품을 제대로 분석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렇다면 왜 이 표현이 중요할까? 왜 뜬금없이 세례 요한의 성에 대해 표현을 할까? 화가의 생각은 무엇이며 어떤 메시지를 화가가 나를 향해 던지고 있을까? 중세 명화는 이렇게 관객에게 숙제도 던진다. 아래 아기 예수의 성이란 주제에서 살펴보자.
마리아가 세례 요한의 옷을 올려 세례 요한이 사내아이임을 밝히는 이 표현의 상징은 아기 예수님이 사내임을 알리는 의미다. 화가가 대놓고 아기 예수의 성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어려웠는지 세례요한을 대신해 알리는 기법을 활용한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대단치 않은 것 같으나 그림의 배경 되는 성경을 참고하면 이 내용은 의외로 중요하다. 예언을 이루시기 위함이며 성경 기록의 진리성을 강조한다. 맏아들이란 단어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아기 예수의 성별에 대해서 지극히 자세하게 표현하고 있고 또 적극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요셉과 마리아의 첫아들 즉 맏아들인 것을 성경 기록대로 묘사한 것으로 사내아이라고 분명하게 선포한다. 그 구절들을 확인해 본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마태복음 1:21)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린도 전서 15:45)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고린도 전서 15:47)
이렇게 성경 속에서 이 예수의 존재는 실패한 첫 사람이자 첫 남자인 아담의 대조되는 남자로 언급하고 있고, 예수와 세례 요한은 태어나기도 전에 사내아이로 이름이 지어졌던 공통점이 있다.
“네 아내 앨라사뱃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누가복음 1:13)
세례 요한 역시 아기 예수처럼 하나님의 강권으로 이 땅에 태어난 인물이다. 이제 예수님을 떠나 곁에 있는 귀여운 세례 요한 아기를 만나보자.
예수의 사촌이며 6개월 먼저 출산한 세례 요한이다. 올려다보는 형상인데 너무 귀엽다. 이 아기 모습은 성경 구절에 따른 기록 대로이다.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마태복음 3:4)
지금 그림 속 세례 요한은 어린아이지만 이 같은 기록에 따라 성인 때의 세례 요한이 입는 의상으로 묘사한 것이다. 성가족 그림에서 어린아이가 둘이면, 그중의 한 명은 아기 예수이고 다른 한 명은 세례 요한이다. 이때 위의 의상을 참고하면 된다.
세례 요한과 연관된 것 중에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신약에서 예수님과 함께 등장하지만 구약의 상징이며 구약의 선지자인 점이다. 의문이 일지만 그렇게 인정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비록 몸은 신약에 있지만 구약 시대를 마감하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이다. 성경에 그렇게 기록해 놓았다. 구절에서 ‘요한까지’라는 단어를 강조한 이유다.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마태복음 11장 13-14절)
필자가 세례 요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성경 내용을 전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 그림에 담긴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세례 요한의 외형적 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례 요한이 자리하고 있는 위치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중앙의 붉은 꽃을 기준으로 좌측은 신약으로서 아기 예수가 있고 우측은 구약으로서 마지막 구약 선지자인 세례 요한이 있는 것이다. 즉 화가는 관객에게 “이 우측이 구약입니다.”라고 알려주는 것이다.
후에 요단강에서 예수님의 공생애를 위해 세례까지 하며 그 마지막 사역의 정점을 찍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신약에 있지만 구약 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였고 예수님 사역의 길을 예비하자마자 곧 목이 잘려 순교한 선지자가 되며 성경 기록에서 사라진다.
작품에서 그가 나무 십자가를 쥐고 있는 것은 십자가의 길을 예비하는 사역을 상징하는 것이고, 꽃을 전달하는 것은 예수님 사역의 길을 예비한 것과 자신의 사역의 완료를 나타낸다.
단순히 아기 예수 곁인 우측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세례 요한의 위치를 관객이 이해를 하게 되면 그림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메시지인 시대 전환으로서의 상징인 붉은 꽃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이제 각각의 인물을 떠나 다른 요소들을 찾아 살펴보자. 이 항목들 속에는 인물과는 또 다른 흥미로운 요서들이 있다. 그리고 작품 해설도 마지막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다.
이 작품의 특징으로 언급하는 것 중의 하나가 시선이다. 인물들 간의 시선을 활용한 구성은 라파엘로 자신이 개발한 화풍이기보다는 이탈리아 피렌체 화방에서 학습할 때 당시 함께 공부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화풍에서 모방한 것으로 해석한다. 기분 나쁠 수 있겠지만 사실로 파악되며 그런데도 불구하고 라파엘로는 결국 자신 것처럼 만들어 정착시키는 힘이 있었다.
인물들 간에 교류하는 시선이 이 작품 속에도 있을까? 멀리서 보면 서로 쳐다보는 것 같지만 깊이 들어가면 서로 교류하는 시선은 없다. 모두 시선의 목적이 다르다.
대표적인 것이 어머니 마리아의 시선으로 위에서 언급한 부분이다. 어머니 마리아는 자식을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붉은 꽃과 나무 십자가를 내려다보고 있으며, 아기 예수는 전달되는 붉은 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를 전하는 세례 요한을 쳐다보고 있다. 시선의 각도를 보면 세례 요한만이 자신이 전하는 붉은 꽃을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모두 다른 시선들이다.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한 사항은 아기 예수의 시선이다. 손으로는 꽃을 받지만 시선은 사람을 향한다. 중세 명화는 분명히 신 중심 사회이기에 하나님이 절대 불변의 기준이지만 하나님의 눈길은 분명히 사람에게 있었고 또 있다. 인간을 창조하신 후부터 변함없는 사실이다.
르네상스 이후에 화가의 시선이 신에서 인간으로 옮겼다는 해석은 회화 예술이라는 일부분 안에서 해석되는 것이지 인류 전체 역사에서 해석된 사실은 아니다.
다시 아기 예수의 시선으로 돌아가 결론을 해석해 보면, 하나님은 사역이라는 일보다는 마음에 하나님 중심을 지니고 있는 인간에게 향하고 있다는 무거운 메시지다. 이 작품 해석에서 많은 부분 가려져 있는 요소이지만 매우 중요한 상징이 담겨있는 시선이다.
언제 기회가 되면 회화 속에서 표현된 여러 시선에 대해 자세하게 다루어 보려 한다.
성가족과 세례 요한이란 작품을 만나면 한 가지 급의 문이 생긴다. 서로가 진짜 만났었나? 하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충분히 만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만났다는 기록은 없다. 신기한 기록은 잉태되었을 때 서로 만났다는 기록은 있다.
이 부분 필자는 참 중요하게 생각한다. 두 인물 모두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자연적으로는 불가능한 잉태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 배속에서 만났음을 기록한 이유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를 강조하기 위함으로 본다. 구절에 나타난 만남을 보자.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누가복음 1:41)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누가복음 1:56)
이런 기록을 참고하면 출산 후에, 아기 때에도 만났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화가가 색으로 묘사한 부분인데 피부색과 높낮이인 인물들의 위치다.
뭐, 이런 것까지 살펴봐야 하는가 라는 생각도 들지만 살펴봐야 할 이유는 많다. 화가는 색으로 말하고 구성으로 자신의 뜻을 전하기 때문이다.
광야로 표현되는 ‘빈 들’이란 구절 속 의미대로 세례 요한의 피부에 색으로 담아 묘사했다. 예수와 비교해 보면 세례 요한이 광야의 거친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이 그림을 담당하는 큐레이트는 세례 요한이 성인이 되었을 때 광야 생활을 했다고 언급하며, 어릴 때부터 광야의 삶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성경 기록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 설명이다.
세례 요한은 그 출생이 광야에서 그리스도 예수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던 삶으로 묘사된 부분이 있다. 이 목적으로 회임이 불가능한 세례 요한 부모들에게 요한을 선물한 것이다. 예수가 나타나기까지 빈 들에 있으리라는 구절이 해석의 키워드이다.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누가복음 1:80)
이 구절에서 본다면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공생애를 시작하기까지 훨씬 이전부터 빈 들에 있었음을 상상할 수도 있다.
또 한 가지는 위치에 관한 것이다. 예수는 내려다보고 있고, 세례 요한은 올려다보는 형상이다. 신과 인간, 창조주와 피조물, 구세주와 원죄를 지닌 성경 기록을 위치로 표현했다고 본다.
지금까지의 여러 가지 주제를 참고해 보면 화가는 배경이 되는 성경 연구를 많이 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철저한 묘사력과 배경이 되는 구절의 해독력이 뛰어날 수 없다고 본다.
그림 속에서 이 같은 묘사를 오랫동안 쳐다보면, 정말 화가의 연구하는 책 넘기는 소리가 들리고 노력의 땀내가 코 끝에 잡힌다. 소리도 들리고 땀 냄새도 풍기는 중세 명화다.
구도와 구성 부분에서 살펴보면 정말 특이한 부분이 눈에 띈다.
마리아 뒤로 로지아의 검은색 석재 기둥이 있다. 이렇게 석재 기둥을 배경으로 등장시킨 것은 우선 마리아의 얼굴을 확연하게 드러내기 위함으로 보인다. 이 작품에서 얼굴에 상징성을 가장 많이 지닌 인물이 마리아이기에 관객들에게 자세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 부분 관객들 모두 동의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구도와 구성면에서 보면 이 석재 기둥의 또 다른 효과를 발견할 수 있다. 허전하지 않으며 뭔가 마리아 뒤에 거대하고 위엄 있는 어떤 힘이 느껴지게 하고 또 보좌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하기도 한다.
그런데 뒤의 수직 기둥과 아래의 수평적인 담을 연결해 보면 하나의 특별한 형상이 만들어진다. 수직의 대리석 기둥과 수평의 담이 십자가 기둥의 머리 부분을 상기시킨다. 그런 이미지가 그려지면 이 성가족이 모두 십자가 위에 올려 앉아 있는 형상으로 비치게 한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가능한 이유가 있다. 이 작품 속 성가족의 공통된 특징적 단어는 죽음이다. 후에 세례 요한은 목이 잘려 순교하고, 예수는 후에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맞이한다. 어머니 역시 아이들의 특이한 삶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성경에 기록했다.
그래서일까? 그림 속 인물 모두는 의로움의 상징인 십자가 위에 앉아 죽음에 어울리게 묘사했다고 해석한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댓글에 남겨 주시고 소통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이렇게 도상적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모든 요소와 선과 구성을 그림의 배경 되는 성경에 대입해 보면 드러난다. 이렇게 본다면 의외로 기독교 명화를 이해하기 쉬운 점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회화 예술에서 색이란 작품을 살아있게 하는 피에 해당한다. 그래서 모든 작품에는 화가가
애호하거나 작품의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해 등장시키는 특별한 색이 있기 마련이다. 이 작품에서는 단연코 청색이다. 중세 당시, 먼 중동 아시아 땅 아프가니스탄에서 채굴되어 마차로, 배로, 육로를 통한 무역으로 유럽에 전달된 울트라 마린블루라는 청금색은 다이아몬드 가격에 비유될 정도로 값비싼 재료였다.
마리아 몸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두 개의 다른 청색이 들어 있다. 오른손으로 잡고 있는 짙은 청색은 예수를 덮기 위해 준비한 포대로서의 천이고, 이 보다 조금 옅은 색의 청색은 마리아의 상의다.
이 청색의 힘을 더욱 강조하는 것은 로지아 기둥 밖에 펼쳐진 하늘이다. 푸르름으로 가득하다. 무한한 듯한 하늘의 넓은 공간에 이 청색이 아기 예수의 끝없는 사랑을 지지한다. 청색은 하늘의 상징으로서 넓고 깊은 하나님의 끝없는 인류에 대한 사랑과 끝없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 하나님 마음의 상징이다. 자애와 사랑과 기다림의 다양한 상징이 담겨있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며 조금씩 옅어지는 울트라 마린블루의 청색을 여러 색조로 나눠 묘사한 화가의 색상 활용이 탁월하다.
중세 때, 성가족의 색으로 붉은색, 흰색 그리고 청색을 성가족의 삼색으로 상징화했다. 붉은색은 십자가 처형, 고통, 십자가의 피를 상징하며, 푸른색은 하늘의 상징으로 끝없는 사랑, 기다림, 넓은 마음 등을 상징하고, 흰색은 예수의 원죄 없음을 상징하는 무오성을 상징한다.
그런데 이곳에는 흰색이 없다. 그렇지만 흰색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은 아기 예수가 벌거벗고 등장하는 상징이 무오성의 상징으로서 흰색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의상이란 에덴동산에서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주신 것으로 인간에게 원죄가 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세기 3:21)
성모자 뒤로 펼쳐진 풍경이다. 왼쪽과 오른쪽 모두 비슷한 건축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경우 화가가 어릴 적 살았던 고향 마을일 수도 있고, 의뢰인을 배려한 특정 지역일 수도 있다. 이 작품에서는 이 그림이 제작된 로마로 해석한다.
성경적 해석은 성이 보인다면 부활 후에 예수를 믿음으로 소유한 구원받은 백성들이 최종적으로 안착할 장소의 상징인 새 예루살렘으로 해석될 수 있다. 구절에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십자가 처형으로 부활을 거쳐 맞이한 천국의 상징으로의 해석이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요한계시록 3:12)
그러고 보면 이 작품에는 창세기 수태고지부터 요한 계시록 마지막까지 모든 성경이 담겨있다. 적은 규격이지만 방대한 넓이를 지닌 작품이다.
마지막으로 중세 명화를 감상하시기 관객분께 선물을 드리고자 한다.
“선지식(知識) 후현장(現場)”이다. 라파엘로의 가장 큰 특징은 부드러움과 조화로움을 꼽는다. 의상도, 인물도, 그림을 통해 관객에게 전하는 세계관 역시 조화로움 속의 긍정과 화합으로 해석한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있다. 전시장에 가기 전에 미리 작품에 대한 사전 조사를 통해 지식을 얻는 것이다. 그 방법 중의 하나로 최대한 확대해서 작품에 가까이 가는 방법이다. 이렇게 확대해 보면 화폭 속의 화가의 붓질을 만난다.
어떻게 의상의 색감과 색조 저렇게 부드럽게 묘사했는지, 요한의 낙타 털이 어떻게 보플 보플하게 묘사됐는지, 전혀 악이 없는 아이의 얼굴은 어떻게 붓질했는지… 등을 간접적이나 만나 볼 수 있다. 화가는 만나지 못하지만 그가 남긴 자국인 붓질은 작품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
미술관에서 제공하는 라파엘로의 드로잉이다. 작품이 전시된 미술관에서는 이런 자료를 공개하고 있으니, 좀 더 깊이 있게 작품을 알기 원할 때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 화가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화가가 인물을 묘사하기 위해 이외에도 여러 동작을 그린 스케치가 전하는데, 필자의 최대 관심은 마리아의 다리였다. 처음부터 마리아의 다리가 보이지 않도록 구성된 것 같다.
그림 설명을 마친다.
한 작품을 선정해 도상을 발견하고, 정밀하게 분석하고, 배경을 참고해 작품과 비교해 보았다.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을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명화 설명 치고는 장문일 수 있다.
어쩌면, 동네 달리기인 줄 알고 뛰어들었다가 뒤늦게 마라톤임을 깨닫고는 빠져나가지도 못한 채 계속 뛰어온 분도 계실 것 같다. 그러나 끝까지 완주하신 분들은 남다른 열매를 이미 지니고 계신다.
그것은, 그림 앞에 섰을 때 다른 분들이 경험할 수 없는 “작품 이해와 도상 해석”이다. 그 결과로 남다른 감상을 하게 되실 것이다. 이 부분 분명하게 약속드릴 수 있다고 본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부분들이 도상으로 눈에 보이기에 스스로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부분 최초로 해석해 설명드리는 것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너무나 중요하기에 다시 언급해 드리며 명화 설명을 마친다. 중세 명화 감상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미술관 방문 전에 미리 작품에 대해 알아보는 것과, 그렇지 않고 무조건 가서 작품을 대하는 것이다.
현장인 미술관에서는 차분하게 살펴보고 감상할 시간과 여유를 갖기 어렵다. 솔직히 그렇다. 성수기 때에는 인파 때문에 작품 앞에 서는 것조차 어려우며, 또 작품에 비취는 조명 빛 때문에 제대로 쳐다보기도 어렵다. 그래서 권해드리는 가장 좋은 명화 감상법 중의 하나가 위에서 언급한 “선지식 후대면”이다. 이 방법을 택하지 않을 시에는 결국 외관만 보고 오거나 인물의 얼굴과 색만 보고 오시게 된다.
믿지 않으시는 분들을 위해 3 작품 사례를 들어보자. 필자가 분석하고 설명해 놓은 내용이, 여러분이 그동안 작품에 대해 갖고 계셨던 지식과 내용과 얼마나 다른지 비교해 보시기 바란다.
두 작품 모두 "수태고지"다. 프라 안젤리코의 작품에는 명화 중에 가장 깊은 낭떠러지와 여인의 자궁이 묘사되어 있고, 오라치오 젠틸레스키의 작품에는 경건한 내용이지만 모든 명화 중에 가장 많은 피(Blood)가 담겨있는 작품이다. 마지막 Rogier van der Weyden의 "십자가에서 내리심"은 밀랍 인형처럼 인물을 구겨 넣은 것으로 설명하지만 외형적인 표현일 뿐 작품 속에는 통풍장치가 들어있어 오히려 세월을 타지 않는 신선함이 도상으로 숨겨 묘사되어 있다. 이 통풍장치가 이 작품의 핵심으로서 전혀 밝혀지지 않은 도상 해석이다. 또한 필자의 해석으로는 기존의 인물들이 바뀌어 해석된 것으로 판단한다.
화가가 절묘하게 숨겨 묘사한 절벽과 자궁 그리고 피와 통풍장치 같은 것이 해석되지 않은 채 작품을 보게 되면 가장 중요한 화가의 메시지를 놓친다.
만약 여러분들이 작품 속에서 위에서 설명한 부분의 내용을 모르셨거나 설명을 못 들으셨다면 가장 중요한 도상을 놓치신 것이 된다.
필자가 현재 탈고한 수많은 명화 해설 원고에는 이전에 공개되지 않은 숨겨진 도상들이 많다. 유튜브 채널 <내 집은 미술관>에 공개되고 있으니 시청하실 수 있다. 대부분 똑같은 중세 명화의 반복된 비슷한 작품 해석과 설명을 벗어나 더 깊고, 더 넓고, 더 다양한 중세 명화가 세상에 소개되기를 소원한다.
중세 명화를 찾아, 현장인 미술관을 돌아다니다가 한 가지 습관이 붙었다. 한 작품을 떠날 때, 아쉬워서 분명하게 인사를 하고 떠나는데 마지막으로 쳐다보며 무엇이 눈에 들어오는지를 스스로 체크한다.
이 작품을 떠나며 다시 바라보니 아기 예수에게 고개 숙인 붉은 꽃이 눈에 들어온다. 특히 살짝 휘어진 고개 부분에 눈길이 간다. 꽃조차 아기 예수께 감사의 고개를 숙인다.
.........
.........
여러분들이 현장에서 작품을 감상하시고 떠날 때 마지막으로 고개 돌려 어떤 부분이 눈에 남는지, 마음에서 읽혀지는지 살펴보시기 바라며, 댓글로 그 진한 감상을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럼, 저는 다음 그림 여행을 준비해 곧 돌아오겠습니다. 함께 긴 시간, 중세 그림 여행에 동참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문을 열면
곧
중세로
발길이 옮겨지는 곳,
유럽의 관문
런던에서
인사 전합니다."
*부탁드립니다. 제 글에서 새로운 도상 발견에 대한 설명이 있어 저작권이 있습니다. 필요시에는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ark353va@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