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수에서 1년 살기
상수동 일기②
제주로 갑니다.
제주를 그립니다.
제주를 씁니다.
카피라이터로 광고 일을 한지도 20년이 훌쩍 넘었고
교수친구 소개로 서울 근교 한 대학에서
학생들 가르친지도 8년이나 됐네요.
그 카피라이터, 그 강사 생활 이제 접어두고
제주로 내려갑니다.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내려갔던 곳인데
이제 손가락으로 더 셀 필요가 없어질 것 같네요.
제주엔 서울 짐 다 싸들고 먼저 내려간 후배가 있어요.
서귀포에서 스킨스쿠버 샵을 하고 있죠.
제주 푸른 바다 아래, 우리가 보지 못하는 세상을
사람들에게 인도하는 마린보이.
그 후배도 사실 광고회사 디자이너를 하다
취미로 했던 물질이 이제 직업이 되어버린 겁니다.
제주엔 또 예전 회사 인사팀 선배가 감귤농장을 하고 있어요.
회사 다닐 때 뭐 별로 친하지 않았지만
이제 같은 도민이 되면 손이 모자라는 감귤 수확기에는
제 손 두 개는 빌려줄 수 있을지도 모르죠.
제주엔 또 제 강의를 들었던 학생이 성산에서 카페를 하고 있어요.
강의 시간에 똘망똘망 했던 모습과 종강파티에서 맥주 한잔 부딪친
거 외에는 특별한 기억은 없지만
제주도에서 목장을 하는 아버지한테 받아온 우유로 직접
밀크음료를 만든다고 하니까 꽤 매력적이잖아요.
가끔은 성산 앞바다를 내려다보며 그림 그리기에도 참 좋은 곳 일 듯 합니다.
저는 그럼 제주에서 무얼 할꺼냐구요?
글쎄요...
하고 싶은 건 많지만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고
꿈에서 깨어나야 꿈을 이룰 수 있는데
아직도 꿈만 꾸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그동안 버스를 운전할 수 있는 대형운전면허증을 따고 있어요.
왠지 모르게 그렇게 되고있네요.
삶이란 이유를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나를 몰고 가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제주에서 버스운전을 하게 될것 같아요.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새벽 5:40분 부터
함덕을 거쳐 성산, 표선, 서귀포, 중문, 협재 그리고 애월까지
왼편 차장에 푸른 바다를 걸고
제주도 234km를
매일 타이어 바퀴를 연필삼아 카메라삼아 하는 기록.
버스에는 바람도 타고, 햇살도 타고, 봄도 타고, 겨울도 타겠죠.
하지만 무엇보다도 유치원 가방을 멘 5살 인생도, 제주 바람에 깊게 페인 주름 투성이 80세 인생도 타겠죠.
그 모든 걸 실어 나르는 제주의 버스 운전사...
영화 패터슨 보셨어요?
‘패터슨’이라고 하는 미국의 소도시에서 버스 운전을 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 예요. 특별한 스토리는 없어요.
주인공은 매일 비슷한 일상을 보내요. 운전 일을 마치면 아내와 저녁을 먹고 애완견을 산책시키고 동네 바에 들러 맥주 한 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하죠.
그리고 일상의 기록들을 틈틈이 비밀 노트에 시로 써내려 갑니다.
저도 그렇게 해보려구요.
그래서
제주로 가려구요.
제주를 그리려구요.
제주를 쓰려구요.
그렇게 그림과 글을
제주의 이름으로 한 권 묶어보려구요
시작 할께요.
[나는 제주의 버스 운전사]
2021.11.05.
C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