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은별 May 09. 2023

PMS 칵테일과 생리 할인

그래, 이건 대우 받는 기분이구나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생리랑 할인이 한 단어로 조합이 될 수 있는 단어였나? 조금 얼떨떨하면서 살짝 들뜨려는 광대를 끌어내려 꽉 잡고 있어야 했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너무 헤벌쭉 좋아하는 건 조금 없어 보이잖아. 하지만 기분은 이미 손에서 놓친 풍선처럼 두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그래, 이건 대우받는 기분이구나. 늘 짐 덩어리 같고 고생스럽기만 하던 것 덕분에 혜택을 받는 기분이란 이토록 사람에게 고양감을 느끼게 하는구나. 돈을 내면서도 즐거웠다. 퇴역 군인들이 왜 그렇게 군인이었단 걸 못 드러내서 안달이며 어떻게 매번 말할 때마다 자랑스러워 하는지 단번에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내가 기여한 공로를 ‘제도적으로’ 사회가 인정해준다는 거 아니야, 군인 우대를 받을 때마다 얼마나 뿌듯하겠어.



그동안 여자의 몸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항상 이율배반적이었잖아. 신비롭지만 짐승 같은 것, 숭고하지만 비밀스러울 것, 엄청난 희생이 따르지만 그것을 절대 희생으로 여기지 말 것. 나의 ‘레거시’를 이어갈 아들이 필요하지만 자기 혼자서는 낳을 수 없어 여자들의 힘을 빌려놓고 한 생명을 잉태하는 일은 너무도 성스러운 일이라 값을 매길 수 없다며 그동안 오래도 공짜로 취해온 것, 그래놓고 마치 숙식은 제공하니 임금은 따로 없다는 악덕 사장처럼 군 것, 그것도 모자라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라고 말해 진실을 뒤바꾸고 열등감을 숨기려 한 것, 하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너희들이 진짜로 두려워 하는 게 무엇인지 드러나게 된 것. 여자들에게는 너희들의 ‘레거시’를 절단낼 힘이 있다는 것 ⎯더 쿨한 건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남자들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만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 그렇지만 여전히 최대 남성 최대 쾌락의 공리주의인 가부장제를 이어가기 위해 여자들을 사회의 무임승차자 취급하고 있는 것, 이런 폭정 속에서 여자 아이들이 생리를 시작하면 너도 마침내 신성한 의무를 다할 수 있는 몸이 되었구나, 그건 드디어 쓸모있는 인간이 되었다는 자격 증빙 같은 거란다, 하지만 그 모든 비용은 자가 부담이야 ⎯특히 그걸로 조금이라도 어떤 혜택을 볼 생각은 꿈도 꾸지 말거라, 그건 여자들 특유의 약아빠진 짓거리고 신성한 의무를 져버리는 짓이야!⎯ 가증스럽고 구역질 나는 축하를 건네는 것.



생리란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어떤 여자들이 아, 이런 게 있었으면 좋겠어 재치있는 발상과 자기들의 호주머니에 들어올 돈을 쪼개는 선량한 마음씨로 베푼 호의는 다른 여자들에게 생리에 대한 즐거운 기억을 하나 더해주었다. 이건 정말 유쾌한 경험이었다. 빼앗긴 권력이 끝없는 의무가 되어 돌아온 인간 세계에서 처음 맛본 마땅한 대우였으니까. 방금 내가 들어선 문틈은 가능성이 인간에게 열어주는 작은 희망의 틈 같은 것이었다. 이래서 인간에게 가장 유의미한 소비는 체험이라는 걸까? 살면서 볼 수 없을 거라 여겼던 풍경에 한 발 들여놓은 기분이었다.



이곳의 분위기는 ⎯이런 비유는 조금 유치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디스토피아물에 나오는 비밀 클럽 같았다. 통제 당하는 바깥 세계에서 사람들끼리 대화 나누고 농담 하는 것을 금지했지만 어떻게든 몰래몰래 그것을 즐기기 위해 찾아든 사람들이 모인 공간 같았달까. 이런 거 하면 안 되는 거 알지만 그래도 나는 틀리지 않았다는 신념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모인 느낌이 미세하게 풍기고 있었다. 아니면 이곳은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암시장 같기도 했다. 양지에서 거래 중지 당한 상품을 구하려 음지로 몰려든 사람들이 찾는 장소처럼 말이다. 암시장의 특징이 판매 규제와 그로 인한 비싼 가격이라고 했을 때 어느 정도 맞는 말 같기도 했다. 직접 지불한 표값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정보를 구하기 매우 어렵고 진입 장벽이 높다는 점에서 간접적인 탐색 비용, 구매 안전성에 대한 심리적 부담감 등 넓은 범위의 기회 비용을 고려했을 때 누군가에게는 꽤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거래일 수 있었다. 판매 수량이 적은 것은 규제 때문이 아니라 스탠드 업 코미디라는 장르가 신시장을 개척하는 단계라 그런 것 아니냐 할 수도 있겠지만 장르가 담고있는 내용물이 여자들의 관점을 담은 유머라는 것을 볼 때 이것은 가부장제 사회가 양산을 금지한 상품이 맞으므로 암시장의 조건을 충족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머가 공공재의 성격을 띤 것을 생각해볼 때 ⎯유머는 문화 예술 계통의 상품이 대부분 사치재인 것에 반해 인간의 정신적 활동을 영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거의 유일한 필수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상 생활에서 웃음을 만들어낸 사람에게 시장 가격을 지불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비배제성과 비경합성의 면에서 유머의 소비는 배제하기 어렵고 한 명이 웃는다고 다른 누군가가 덜 웃게 되는 경합성도 없기 때문에 공공성을 충족한다!⎯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이런 무대를 만든 코미디언들의 사정은 여러모로 암시장이라기보다는 이거 누군가는 꼭 해야 해 하고 가부장제의 배교자들이 모여 그들만의 복음을 전파하는 비밀 집회에 가깝다고 느껴졌다. 그러니까 들어온 순간 내가 어머, 지하 성전에 입성한 신자가 된 것 같아 하고 느낀 건 오타쿠의 흔히 있는 급발진이 아니라 다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와 조건이 갖춰져 있어서 그랬던 것이라고!



어쨌든 이 분위기를 충분히 즐기기 위해 술을 주문하러 갔다. 빠져나가지 못한 담배 연기처럼 지하 공연장 안을 꽉 메운 소음에서는 들뜸과 설렘의 기운이 맡아졌다. 덩달아 신이 나 업된 기분으로 카운터 앞에 섰을 때 나는 또 한 번 즐거운 충격을 받아야 했다. 메뉴판에 쓰인 칵테일 이름이 난생 처음 보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익숙한 명칭이었지만 그 이름들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 날, PMS(생리전증후군), 블러디 퍼니 칵테일이라니. 거기다 부담 없고 상큼한 “그날” 칵테일 옆에는 웃고 있는 생리컵이, 부드럽게 넘어가는 “PMS” 칵테일 옆에는 윙크하는 생리 팬티가, 진하고 강력한 복숭아 향 “블러디 퍼니” 칵테일 옆에는 마이크를 쥐고 포즈를 취한 생리대가 귀엽게 그려져 있었다!



매번 술집에 갈 때마다 섹스 온 더 비치, 오르가즘, 옥보단 이런 남자들이 유쾌한 척, 센스 있는 척, 야한 농담을 수위 적절하게 넘나드는 척, 재야의 신동엽인 척 하면서 짓는 전형적인 이름들만 보다 예상치 못한 위트에 진실한 웃음이 빵- 터지며 심장에서 뿜어낸 통쾌함이 빠르게 온 혈관을 뚫고 지나갔다.



그리고 발견한 또 하나의 가능성, 아, 어쩌면 우리는 이런 걸 유머로 즐기는 세상에서 살 수도 있었겠구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가정법이지만 어쨌든 여기 이렇게 한 번은 현실에 구현된 장면을 보았잖아, 그게 큰 보상이 되었다. 친구들에게 생리대 빌릴 때 체육복 빌리듯 “야! 누구 좋은 느낌 있는 사람?! 나 지금 대형 각이야!!” “아, 저 새끼 상습범이야, 좀 갖고 다녀!” “아, 진짜! 제발! 오버 나이트로 갚을게!!”라고 말할 수도 있을 뻔 했던, 평행 우주 속에 하나쯤 있을 법한 세상 ⎯근데 이런 세상이라면 생리대는 이미 무상 보급에 곳곳에 생리대가 비치되어 있지 않을까 싶지만서도, 십대의 허세는 못 말릴 테니까⎯, 배란기면 어김없이 터지는 성욕에 대해 은근히 과시하며 남자애들은 모르는 여자들만의 세계가 있다는 듯 자기들만 아는 은어로 떠들어 대지만 속으로는 내심 남자애들이 알아듣고 얼굴 붉히며 내숭을 떨고 자기를 이성으로 바라봐주길 고대하는 세상, 그러다 자기들끼리 불 붙어서 나는 배란기 때 이런 짓까지 해봤다 배틀로 흘러가 옆에 있는 남자애들은 까맣게 잊고 수위는 진작 넘은지 한참인 채로 신나게 떠들다, 반에 꼭 하나씩 있는 새침한 남학생에게 핀잔을 듣고는 머쓱해 하며 음담패설을 멈추고 조용히 “에붸붸, 남자애들은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사나 몰라” 궁시렁 거리는 세상, 여자들 간의 우정과 유대가 이성애적 욕구를 가뿐히 뛰어넘는 세상, 그런 상상이 머릿속을 관통하며 지나갔다.



나는 고민이 길어졌던 척 하며 PMS 칵테일을 주문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메뉴 설명을 보니 딱 내가 마셨을 법한 음료다. ⎯지금 나는 내부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때 만들었던 메뉴 포스터를 꺼내 볼 수가 있다. 하하하⎯ 그리고 자리로 돌아와 분위기에 적응할 겸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며 태연한 척 일행과 시덥지 않은 대화를 나눴다. 테이블마다 놓인 작은 초들이 일렁이며 동굴 벽화 같은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스탠드업코미디 #여성혐오 #유머 #코미디 #여성주의 #여성문화 #ofsw #페미니스트

#가부장제 #페미니즘예술 #페미니즘콘텐츠 #사회구조 #차별

매거진의 이전글 이런 데서 페미니스트 타이틀을 달고 코미디를 한다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