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딜레마
우리는 조금 애매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야 하는 건물은 1층 술집과 입구를 공유하고 있는데 여기는 아마도 주로 외국인 손님들이 애용하는 바였나 보다. 건장한 외국인 남성 몇몇이 무리 지어 담배를 피러 테라스 앞 길가에 나와 앉아 있었고, 들어가려면 이 앞을 지나가야 했다. 사실 몇 십 미터 전부터 그들이 있는 쪽을 보고 있었지만 그 말은 그쪽도 우리를 볼 수 있었다는 뜻이고, 여기서 갑자기 방향을 트는 건 조금 많이, 굉장히 어색한 일이었다. 일직선으로 놓인 골목에서 직진하다 갑자기 뒤를 돌아 왔던 길을 되돌아 가는 모습이 조금이라도 자연스러워 보이려면 한 명은 소스라치게 놀라 더듬더듬 자기 몸을 뒤지기 시작하고 한 명은 덩달아 깜짝 놀라며 핸드폰을 꺼내 ⎯무음이라 어차피 소용도 없을테지만⎯ 전화를 걸어주며 성의라도 보이는 척 하는 열연을 펼쳐야 할 판이었다. 멈추지도 못하고 돌아서지도 못하고 걸음걸이는 점점 부자연스러워지는 걸 느끼며 어그적어그적 걷는 동안 입구는 계속 가까워졌다.
우리는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들어가기 전 입구 앞에 서서 마지막 고민을 해보고 싶었으나, 그럴 의도는 없었겠지만 어딜 가든 자기들의 영토처럼 만들어버리는 그런 무리 앞에서 서성대고 있을 두둑함은 없었다. 수면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물총새처럼 그들 옆을 지나 잽싸게 계단을 내려갔다. 이렇게 끝까지 떠밀려가는 기분이라니. 그나마 위로가 되는 건 아까는 꺼져있던 간판에 불이 들어와 조금은 그럴싸해져 있었다는 점이다. 한 발짝, 한 발짝 내려가는 동안 마지막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걸 했다. 심호흡 하기. 그래 어차피 이제 더는 뒤로 물릴 수도 없어. 길어야 한 시간일텐데 그냥 나 죽었소 하고 눈 딱 감고 앉아있다 나오자. 자, 이제 진짜 여는 거야. 하나 둘 셋, 흡-!
문을 여는 순간 두꺼운 철문 안쪽에 갇혀있던 웅성대는 소음이 밀려나왔다. 새어들어오는 빛에 구조대원의 얼굴을 확인이라도 한 것처럼 안심이 되는 소리였다. 나 말고도 여기 이미 와 있는 사람들이 꽤 있구나- 초식 동물처럼 미지의 영역을 염탐하는 모양새로 한 발짝 들여놓자 안에는 인스타에서 얼굴을 봤던 사람이 티켓을 끊어주고 있었다. 신기했다. 정말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었다니. 몇 주 전부터 북마크 해놓고 종종 찾아보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가.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나 홀로 페미니스트라고 외치는 여자 코미디언이라니. 정말로 실존하는 인물인가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지금은 사라진⎯ 이 공연장 인스타그램 피드에는 정말, 정말 아무리 내려도 남자들 사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남자들이 마이크를 쥐고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악을 쓰고, 호쾌하게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사진들 속에서 유일하게 발견한 동성 성별의 인물이었다. 그것도 자기 사진에 버젓이 페미니스트 다섯 글자를 박고서. 하지만 이 지점이 바로 의구심을 자아내는 부분이기도 했다. ⎯빌어먹을, 여자들의 경계심이란⎯
이런 곳에서 페미니스트 타이틀을 달고 코미디를 한다고? 그게 가능한 일이야? 페미니스트라고 하지만 사실은, 남자들이 좋아하는 야한 농담이나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스러움이 속절없이 돌려대는 테이크 아웃 잔 안에서 빙글빙글 찰랑댔다. 왜 그런 여자들 있잖아, 이게 바로 당당한 여자들이 누려야 하는 권리야 라고 외치면서 다른 여자들을 진부한 여자로 만드는 재주가 있는 사람들. 이제 여자들도 섹스에 대해 솔직하고 개방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정확하고 대담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시대가 왔어, 그게 진짜 섹시한 거라구 친구들, 이라며 삶의 경험을 토대로 섹스 토크는 남자들과 해도 되는 대화 주제 리스트에서 지워버린 다른 여자들의 지혜와 연륜을 그저 자신을 돋보이게 만드는 발판으로 삼는 여자들, 나는 이런 위험하고 도발적인 주제도 얼마든지 스스럼 없이 꺼낼 수 있고, 심지어 입 밖으로 꺼내는 정도가 아니라 화려한 NBA 볼 플레이 하듯이 재미있게 양념까지 쳐서 다룰 수 있어, 이런 걸 남자들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구우, 난 그런 것도 할 수 있는 여자야, 다른 여자들과는 달리. 남자들이 듣고 싶어하는, 다른 여자들은 더 이상 해주지 않는 요깃거리 이야기를 던져주며 남자들이 원하는 여자가 되어가는 그런 진짜 진부한 여자, 그런 걸 보게 될까봐 마음이 졸여졌다.
나의 우려는 합당하고 합리적인 것이었다. 페미니즘 포장지를 두른 겉껍데기에 속아 허탕 치고 돈만 날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외면하고 싶은 마음을 이겨내고 선택한 결과가 고작 이거야? 스러운 경험을 숱하게 겪은 페미니스트들이 중앙은행 금고마냥 철통 같은 보안 장치를 앞마당에 파묻어 두고, 방공호 속에 들어가 눈만 내놓은 채 탐지기가 요란하게 울리나 안 울리나만 지켜보고 있게 된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예쁘게 치장한 여자가 하이힐 신은 발로 남자의 가슴팍을 짓이긴 뒤 넥타이를 끌어당겨 키스를 날리는 장면 같은 건, 정말이지 그만 보고 싶었다.
아니면, 지금 당장 지구상에 현존하는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는 해답을 내놓지 않으면 여자들의 그 어떤 시도도 존재하지 아니함만 못하게 만드는 세상의 법칙에 따라 모든 날카로움이 마모된 동글동글한 조약돌 같은 것을 보게 될까봐 그것대로 답답해졌다. 오만 군데 허락 받고 양해를 구한 뒤에야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는 ⎯부연 설명⎯ 투성이의 화법 말이다. 혹은 돌고 돌아 모든 여자는 아름다워, 이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여자는 없어, 러브 유어 셀프, 있는 그대로의 네 모습을 사랑해줄 사람이 있을 거야 차 떼고 포 떼고 중요한 얘기는 사라지고 구조를 바꿀 도리가 없으니 그냥 네 마음 상태를 바꾸면 모든 게 해결될 거야 라는 식의 신비적 종교스러운 메시지 같은 것을 보게 되거나. 내가 이런 동글동글한 말에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이유는 당장의 위로는 될지언정 끝내 모든 여자들을 아름다움의 울타리에 가두고 대상화의 진창에 쳐박기 때문이다. 섹스에는 진취적이지만 그 외 나머지 모든 일에는 공격성을 상실한 여자, 이것이 남자와 여자들이 동시에 만들어가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그래, 이런 상황에서 무슨 농담을 어떻게 한단 말이지?
그렇게 잔뜩 의심스러움에 젖어서 척척한 발을 마저 들여놓는데 이런 말이 들려왔다.
“생리.. 생리 아시죠? 하하, 생리를 아시는 분들껜 할인을 해드리고 있는데 할인 받으시겠어요? 하하, 아.. 안 받으셔도 괜찮고요.. 아, 네, 여기, 생리 할인 받으셔서 오천 원 할인해드려서 오천 원입니다. 두 분이니까 만 원이네요, 아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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