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er병문 Apr 28. 2024

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훈련일지)

ITF 번외편 - 화산논검(華山論劍)이 아닌 안산논권(安山論拳).

- 2024 ITF 안산 대회에 관한  뒤늦은 이야기


0. 고려인, 러시아인 무서워요 ㅠㅠ


가라테 세미나를 한두 번 들을 때부터, 2000년대 들어 그 유명한 극진 유파뿐 아니라 여러 가라테 유파, 혹은 유도, 합기도, 대도숙에서 다시 개명한 쿠도에 이르기까지 일본인 챔피언들이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 자리는 근골 좋고 강건한 러시아인들이 차지하고 있다고 했다. 그 동안 숱한 무공들을 조금씩 만져봤지만 주짓수를 할때 빼고는 서양인들과 붙어본 적은 별로 없었다. 나의 왼쪽 발목과 무릎 인대를 가져간 미군 소속의 선수 또한 그렇게 큰 덩치는 아니었었다. 러시아 선수들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나고 먹고 자며 자란 고려인들의 위상은 ITF태권도를 하면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는데, 러시아 선수들이야 그렇다치고 고려인 3세 정도만 되어도 한국어가 그렇게 뛰어나지 않고 4세가 되면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정도 빼고는 진짜 영어도 안 통하고 눈인사와 손짓발짓으로 의사 소통을 해결해야할 정도...(...) 식성도 전혀 달라서 김치도 안 먹는 사람들 많고, 초콜릿을 비롯한 초코파이에, 도시락 컵라면, 마요네즈, 후추 뿌린 양파만 잔뜩 넣은 고기만두를 우걱우걱 입에 넣고, 틀은 잘 못하더라도 맞서기는 하나같이 누구 하나 피 터지고 뼈 부러지고 쓰러져야 끝날 정도라는 고려인들의 맞서기는 과연 매년 볼때마다 장절함을 넘어 무서웠다. 작년 대회에서 우리 도장 선수를 비롯해서 여러 나라 동년배 소녀들의 콧대를 주저앉히고 갈빗대를 날려버린 긴 머리 고려인 소녀는, 틀 연습할때보니 흰 띠라서 더더욱 무서웠고, 고려인들은 정말이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 그런 친구들만 있었다. 그런데 그런 소년소녀청년처녀아저씨아주머니할아버지할머니 가 우글우글한 (전투민족 사이어인?!) 안산에서 대회를 한대....(...) 솔직히 당연히 나가야하지 않겠냐며 틀, 맞서기에 참여 신청서를 나도 더욱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1. 안산 - 한국 속 작은 러시아.


안산을 자주 간적은 없었지만 마계인천, 고담대구, 갱스 오브 부산 을 찜쪄먹는다는 부천에 나는 한동안 오래 있었고, 부천보다 더하다는 안산드레아스- 안산은 부천 밤생활할떄 두어번 가보았다. 야밤에 낮처럼 휘황찬란하게 불을 켜놓았고, 10대 후반들이 주로 노는 부천보다도 더 어린 10대 초중반 소년소녀들이 십오년 전에도 화장과 문신을 짙게 하고 밤거리를 돌아다니며, 게다가 온갖 국적의 외국인들이 왜 이렇게 살벌하게 돌아다녀...(...) 훗날 대림역에서 태권도장을 다니면서, 대림역 8번 출구쪽에 조선족뿐 아니라 여러 외국 국적 서양인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나는 십여년 전의 그때 그 안산을 떠올렸었다. 게다가 안산은 낮에 찾아가면 수천 장의 유흥전단지가 바람에 펄럭이며 모든 가게가 문을 닫고, 조용하게 잠든 도시였다. 아내의 직장 쪽 도시를 찾아가면, 역시 옛날 유통을 주름잡던 대기업들이 다 빠져나가며, 역시 왕년의 직장인들 밤을 책임지던 유흥업소들이 전부 문을 닫고 을씨년스러운 폐가들만이 남았는데, 그와도 비슷한 기분이었다. 그로부터 십여년간 안산 부천에는 갈 일이 없었고, 있었다 해도 좋은 기억이 없어 피했을 터이다. 그러므로 오랜만에 대회장으로 찾아간 안산은 내가 보기엔 그냥 러시아...(...) 온통 러시아인이었고, 고려인들이었고, 그들끼리 러시아말을 주고받으며 대회준비를 하느라 정신 없었다. 조만간 러시아어 좀 배워야 되려나...



2. 틀 - 내 생각보다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콜라 부사범님이 미리 보내준 대진표 Adult 란에 내 이름이 아무리 봐도 없길래 '어, 음?!' 하다가 콜라 부사범님에게 전화하기 직전, 혹시나 싶어서 찾아본 Senior 란에 내 이름이 있었다...(...) 남자 나이 40세.. 이젠 Senior로 분류되는구나;; 그래도 작년 세계대회 때 나는 50대의 젊은(!) 유단자와 코피까지 흘리면서 장절하게 맞서기를 하신 칠순의 아르헨띠나 어르신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고, 태권도를 끝까지 한다면 그처럼 늙으리라 다짐하였다. 중년의 남자 유단자는 많지는 않은지, 옛날 우리 도장을 다니시다가 돌도끼 장 사범님을 따라 산본 도장으로 옮기신 양 선생님이 틀에서 붙게 되시었다. 형님뻘인 양 선생님은 아직 초단이시지만, 나와 달리 아주 어렸을때부터 무공을 연마하셨고, 이제 중학생인 아드님도 훤칠하게 자라 아버지와 함께 연습하고 있었다. ITF 규칙에 따라 더 높은 단의 틀이 높은 점수를 가져가긴 하지만, 그렇다고 높은 단의 틀이 타짜 삼팔광땡마냥 또 무조건 이기는 것도 아니다. 유급자 시절 우리 도장에서 날렵하고 안정적인 발차기를 보여주신 양 선생님이시기에 나는 사실 긴장을 많이 했다.



첫 자유 틀에서 나는 3단에서 가장 높은 틀인 최영 틀을, 양 선생님은 초단에서 가장 높은 계백 틀을 연무했다. 어쩌다보니 망국의 명장들 특집 틀...(...) 사실 그 동안 발바닥이 찢어지게 연습을 많이 해서 나도 이제 제법 발차기가 상당히 높고 안정적으로 잘 나온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영상을 촬영해주시던 인천 화백 사범님이나 콜라 부사범님, 해커 사제도 다들 발차기가 무척 좋아졌다길래 안심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영상을 보니, 돌려차기 나 구부려 준비선 뒤 옆차찌르기 는 확실히 좋아졌는데, 반대돌려차기 후 버티는 동작이 생각보다 너무 짧았다. 반대돌려차기가 너무 짧게 나가니 제대로 버티질 못해서 그 다음에 뒷차찌르기도 엉성하게 흔들렸다.


지정 틀은 양 선생님과 나 모두 초단의 두번째 들은 포은 틀이었다. 포은 틀의 핵심은, 중간 부분에서 빠르게 치고 막고 빼고 꽂는 연속 동작이다. 여기에서 나는 좀 빨라져서 후다닥 끝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어쨌든 3단 부사범 주제에 최영 틀을 들고 나갔는데도, 3:2였고 (그러니까 실제로 양 선생님이 훨씬 잘했다고 생각하신 분도 있었다는 거다.) 높은 발차기가 아예 없는 포은 틀도 압도적으로 이기진 못했다. 더 많이 노력했어야 할 틀 부분이었다. 어쨌든 금메달은 받아왔다.



3. 맞서기 - 학생, 왕돈까스 먹지 마.


발차기를 거의 하지 않는 버릇이 나조차도 지겨워서, 그래서 올해 들어서는 맞서기 연습을 참 많이 했다. 발차기 연습도 진짜 많이 했다. 하지만 막상 맞서기 대회에 나가면 낭심보호대를 찼다는 사실을 감안해도 발이 참 잘 안 올라간다. 굳이 핑계 하나 들자면, 원래 점심을 먹지 않으려 했는데, 그래도 점심은 드셔야 되지 않냐고 다들 하도 그래서 결국 점심을, 그것도 류승범 배우마냥 왕돈까스 하나를 뚝딱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나랑 같이 점심 먹은 사람들은 오전에 시합을 다 끝내서 밥을 먹어도 되는 사람들이었다. 아니, 이게 무슨 비트에서 고소영한테 속아서 야구 보러 갔다 피보는 상황이냐;; (영화 비트에서 우등생 고소영은, 다른 학생들을 기죽이기 위해 일부러 남자친구 정우성에게 주말 동안 야구경기를 보고 오게 하고 그 내용을 외워서 월요일에 학생들에게 야구 이야기를 하며, 공부 하나도 안하고 야구만 봐도 공부 잘하는 우등생 연기를 하는데, 그에 충격받은 같은 반 친구가 자살하면서 인생이 꼬인다.) 그래도 일단 왕돈까스는 맛있었지만, 첫 경기를 하는데 배가 묵직하니 확실히 제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또 영상을 보니 그래도 예전보다 훨씬, 오히려 내 실력보다 움직임이 좋았던 게 또 웃겼다. 좌우 돌려치기나 올려치기는 거의 없었고, 발차기도 여전히 적었던게 좀 아쉽긴 했지만, 좌우로 몸도 잘 흔들었고, 한번씩 높은 발차기도 잘 나왔고, 내 실력보단 훨씬 잘했기에 첫 시합을 연장전까지 가서 어쨌든 이긴 것에 대해서는 나도 크게 할 말이 없었다. 다만 상대방이 아직 검은 띠도 못 따신 50대 색깔 띠인건 비밀...(....)


2회전에 드디어 또 정 사범님을 뵈었다. 국기원 6단 출신의 동갑내기 정 사범님. 지난 세계대회 때 흰띠 도복을 입고 오셔서 돌려차기로 내 명치를 후려버리시는 바람에 그대로 쓰러지게 만드셨던 정 사범님. 나는 정 사범님께 어떻게든 바짝 붙어 주먹을 날리고 또 날렸지만, 항상 첫 발로 날아오는 정 사범님의 돌려차기를 뻔히 알면서도 전혀 막지도 피하지도 못하고, 늘 한두방씩 맞고 시작했다. 나중에서야 알았는데, 국기원 태권도만 주로 해오신 정 사범님은 지난 세계대회 때 근접해서 계속 날리는 내 주먹을 깨려고 따로 특훈을 엄청 연습하셨다고 했다. 어쩐지 저번과  달리 아무리 달려들어도 거리를 좁힐수가 없더라니...(...) 정 사범님의 나래차기를 맞은 허벅지 위쪽은 진짜로 내 얼굴만큼 피멍이 들어서 일주일 이상 갔고, 보지도 못한 뒷차찌르기는 내 갈빗대에 꽂혀서 지금까지도 아프다. 그래서 난 이번에도 맞서기는 은메달에 그쳤다. 정 사범님은 결승에서 역시 색깔띠의, 그러나 이전 이력이 상당히 의심되는 고수 중년의 선수와 화려한 발차기를 선보이시며 우승을 거머쥐시었는데, 나는 갈길이 멀다. 갈비가 낫는대로 나는 발차기 연습을 더 해야 한다. 콜라 부사범님은 이미 연계발차기 연습에 들어갔다.



참고로 국내 ITF 맞서기의 수준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보은군에서 영어 교사를 하는 젊은 미국 처녀 두 명은 보은도장 소속으로 몸매가 통통하고 순하게 생긴, 마치 외국 영화에서 호박모양 공단 드레스 입고 '하우 뷰티풀~~' 하면 될것 같은 인상인데, 몸매에 비해 어찌나 발차기가 빠르고 날카로운지, 우리 도장에서 날고 긴다는 칠레 가비의 무릎을 깨고 턱을 날렸다. 보은의 최 사범님은 보은에서 오랫동안 태권도를 하셨고, ITF를 함께 하신 뒤에도 외국 선수들과 조금도 물러남이 없는 현역 선수신데, 역시나 명장 밑에 약졸이 없었다. 그런가 하면 돌프 룬드그렌과 똑같이 생긴 러시아 흰 띠 선수는, 확실히 권투든 뭐든 한듯한 움직임은 분명했는데, 발차기도 그렇게 빠르거나 다양하지 않았고, 공격 형태도 단순하고 느렸지만, 왼쪽 주먹 돌려치기가 끝내줬다. 즉, 그의 느린 공격을 뚫고 근접 거리로 들어오면 예외없이 왼쪽 돌려치기를 맞고 쓰러지거나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 왼쪽 돌려치기 하나로, 시합도 많았던 헤비급 결승까지 가서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제아무리 다양한 발차기와 주먹 기술을 가지고 있었어도, 근접 거리에서 무쇠같이 터지는 왼쪽 돌려치기를 이기진 못했다. 작년 세계 대회 때 나는, 나와 키가 비슷하면서도 빠르고 다양한 손발 기술을 갖고 계신 영국 사범님께 무척 놀랐었는데, 이번에는 무쇠같고 바위같은 러시아 흰 띠 선수의 대포알 같은 왼쪽 돌려치기에 무척 놀랐다. 내가 맞서기에서 어느 정도 두각을 드러내려면, 저런 선수들처럼 나만의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4. 안산논권 - 고마운 사형제 사자매, 그리고 사범님.


올해 5월 1일은, 내가 도장에 온지 10년된 해다. 소은이 때문에 아무래도 시간 내기가 쉽지 않아서 아내의 허락을 받아, 밥 잘하는 유진이, 사범님과 함께 미리 술 자리를 함께 했다. 실컷 술을 마시고 겔겔거렸더니, 함께 '화요' 를 마셨던 밥 잘하는 유진이가 '나는 싱글이잖아요~' 하면서 계산을 미리 해버렸다. 이 녀석이 하고 카드를 꺼내들었더니, 손칼옆으로떄리기가 연달아 들어왓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밖에서 사마시면 25,000원에 달하는 40도짜리 화요를 마시지 말걸 그랬다. 그러나 이제 밖에서 오천원짜리 소주 사마실바엔 화요를 한 병 마신다.


사범님이 아니었다면, 아마 나는 장가도 가기 어려웠을 터이다. 사범님은 나에게 단순히 태권도만 알려주신 게 아니라 삶의 많은 방식을 바꾸어주셨다. 나는 태권도장에 있으면서 내 개인적인 신체 기량도 많이 올리고 바꾸었지만, 그 동안 가지고 있었던 삶의 고루한 면도 많이 고쳤다. ITF태권도를 하면서 더 넓은 세상을 보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몇 개의 기술에 천착하며 사람을 떄려눕히고 쓰러뜨리는 짓에만 골몰하는 속 좁은 사내로 남았을 수 있다. 현명한 아내는 결코 그러한 나를 만나지 않았을 터이다.



이번 안산대회를 치르면서, 나의 부족함을 또 한번 느꼈고, 반면 이렇게 부사범과 함께 훈련하면서도, 물론 콜라 부사범님이 항상 나의 부족한 면을 많이 메워주지만, 또한 즐겁게 대회를 함께 치르고 몇날 며칠 그 감상을 오랫동안 남겨주시는, 남녀노소, 국내외를 불문하고 많은 사형제 사자매가 계셔서 고맙고 즐거웠다. 도장은 늘 있는 장소 같지만, 흐르는 물처럼 끊임없이 사람이 와주고, 또 우물 바다처럼 사람이 모여 고여있어야 끊임없이 크고 발전한다. 이러한 사제 사매들께 부끄럽지 않게, 수련자 출신 부사범이라도 늘 열심히 더욱 연습해야 한다. 일단 갈빗대 좀 낫고..ㅠㅠㅠ







작가의 이전글 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독서감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