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가족모임
그러므로 헤겔은 시대정신에 대하여 말하였는데. 시대정신이란 시대의 주축이 되는 이들이 갖는 주체적 지성의 본질일 터이고, 이 시대정신은 다시 동시대의 다른 구성원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일견 엘리뜨주의이기도 하겠지만, 사회의 기초적 과정을 이수한 이들이 어느정도 동일한 가치관을 지닐수밖에 없다는 점에 대해서는 공감한다. 그러므로 시대정신과 그 시대의 인간은 좋든싫든 관계를 맺는다.
가족모임을 맞아 어머니가 정하신 한정식집은 안타깝지만 가격에 비해 그리 맛이 좋지 아니했다. 친절과 맛은 별개였다. 전통 한정식, 이라는 이름 바로 옆에 붙은 fusion restaurant 이름을 본 그 순간, 예약을 취소했어야 할지도 모른다. 마치 정통중식식당 을지문덕 에 온듯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불화하는 원수와 한우 구워먹느니, 가족끼리 먹는 컵라면이 훨씬 맛있으리라는 마음으로 먹었다. 직원 분들은 친절하시었다.
재료의 맛은 몹시 흐렸다. 일찍이 밥 잘하는 유진이는, 이른바 코스 요리란, 영화나 소설과 같아서, 음식과 음식 사이 연결이 긴밀해야하고, 앞 음식이 뒷 음식을 밀쳐내거나, 뒷 음식이 앞 음식을 덮지 말아야하며, 마지막 후식까지 먹었을때, 내가 어떤 코스를 먹었는지 분명히 인상을 갖는 코스가 비로소 코스라고 했다. 전체적으로 음식들이, 가격 생각이 안날수가 없는 맛이었으나, 무엇보다 재료의 맛이 밍밍하고 흐려
과연 갖은 양념을 하지 않을수가 없겠거니 싶었다. 그 절정은 장어구이와 전복에 있었는데, 먹는데 크게 군말없는 아내조차도 이런 해산물은 처음 본다는 표정이었다. 장어는 비린.맛을 남기며 혀 끝에서 힘없이 흩어졌고, 전복은 삶아낸 지우개 같았는데, 이 재료의 맛을 가리기 위해 발라놓은 크림이며 양념이 너무 어색해서 난감했다. 나조차도 새삼, 밥 잘하는 유진이와 털보 큰형님이 음식을 정말 잘하는구나 느낄 정도였는데, 약주를 하지 않으시는 어머니께서 떫은 표정으로 조용히 말씀하시었다. 그 시집 간다는, 요리허는 아가씨 좀 불러야 쓰겄다. 재차 말하지만 직원 분들은 몹시.친절하시었다.
만약 이렇게 밍밍한 재료와 어색한 양념을 덧붙인 요리들. 혹은 편의점에서 언제든 손쉽게 접하는 가공 재료에 달고 짠 맛만으로 이루어진 간편식이 현재 우리나라의 식문화를 이루고 있다면, 설마 여기에도 우리의 시대 정신이 깃들거나, 혹은 이러한 음식들이 시대 정신의 일부가 되는 것일까? 전문적인 미각 훈련을 받지 않는 내 혀에도 오늘의 음식은 가격에 비해 너무 허망한 맛이었다. 이러한 음식이 기준이 된 세대는, 먹는 일이란 대단치 않는 기쁨이라 여길지도 모른다. 갓 구운 생선이나 튀김의 맛, 캐내어 버무린 나물의 맛 따위를 모르는채로 저조차도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처럼 어느 생산수단에 예속되어 살아가며 인간으로서의 기초적인 도덕이며 윤리를 잊을지도 모른다면 너무 과장인가.
돈 안 빌려주는 장인장모를 사위가 납치하여 죽이고, 성매매를 미끼삼아 꾀부리던 악랄한 십대가, 그보다 더 잔인한 이십대에게 칼 맞아 죽는 세상이 되었다. 이토록 힘들고 어려운 세상에, 오로지 믿을 수 있는건 나와 내 주변뿐이다. 그런데, 먹고 마시는 기쁨조차도 가끔은 느낄수 없는 순간이 있어 슬프다. 그래도 가족들이 즐거워하시어 다행이었다. 세 번째 강조하지만 직원분들은 정말 친절하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