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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 Jul 21. 2016

'엄마'라는 존재에게 강요되는 것들

영화 '케빈에 대하여'를 보고

결코 '왜'인지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케빈이 왜 그런 극악무도한 죄를 저질렀는지, 그리고 그의 엄마인 에바에게는 왜 그랬는지. 그저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라는 말뿐.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 대사를 듣는 순간 나는 완벽한 '악'을 마주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유는 없었다. 그에게. 

2년 전 그때는 엄마에 대한 복수 혹은 애정 갈구를 위해 자신이 그랬던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후 시간이 흘러 생각해보니 아무 이유가 없었다는 말처럼 들렸다. 나에겐. 그래서 너무 섬뜩했다. 참회하는 눈빛도, 후회하는 눈빛도 아닌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라고 말하고 있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섬뜩했다. 에바는 그 눈빛을 보고 나서야 확실하게 인정한 듯 보였다. 자신이 그토록 궁금해했던 이유를 그제야 알게 된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저 '악'이라는 것을.  그런 아이를 자신이 낳았다는 것을. 그녀의 첫 자발적 포옹은 그런 아들을 낳은 책임감의 행동으로 보였다.  

케빈의 행동이, 그가 저지른 끔찍한 살인이 모성애가 부족한 엄마에게서 태어난 아들이었다는 것으로 설명이 되는 것일까? 그 책임이 '엄마'에게 있는 것일까?






자유롭게 살던 에바는 실수로 임신을 했고, 결국 평범한 엄마의 삶을 살아간다. 그녀는 엄마로서의 책임을 다하려 열심히 노력한다. 하지만 확실하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에바는 아이를 대하는 것에 굉장히 어색해한다. '왜'인지는 모르겠다는 얘기는 실수로 아이를 가진 엄마라고 해도 본능적으로 모성애를 느끼는 여성들도 많기 때문이다. 





여자로서 느끼는 동질감과 두려움


무엇을 분별하거나 판단할 수 없는 갓난아기인 케빈은 또 알 수 없는 이유로 엄마인 에바를 계속 힘들게 한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모성애는 조금 부족하지만 아이를 책임지고 어떻게든 잘 키워보려는 에바가 안쓰러웠다. 진한 모성애를 가진 '엄마'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누구나 준비된, 모성애 가득한 엄마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아직 아기를 가져본 적이 없는 나는 에바와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나 역시 나에게 모성애가 있는지 없는지, 내 아이를 낳았을 때 어떤 기분일지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도 에바와 같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준비 없는 만남은 자신의 자식이든 그 누구든 늘 어색한 법인데 그래도 애써 아이를 진정시키려는, 최선을 다하려는 에바의 노력에 비해 갓난아기인 케빈은 엄마의 곁에서만 부지런히 울어댄다. 그녀의 짜증과 인내심의 한계가 고스란히 나에게도 전해졌다. 단지 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견뎌내야만 한다는 '엄마'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어쩌면 폭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내 주변에 막 아기를 낳은 초보 엄마들이 많다. 그녀들의 하소연들이 에바의 짜증 섞인 얼굴 위에 떠올랐다. "내 아이지만 때리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나만 왜 이런 희생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아이 낳은 것을 후회해.", "넌 절대 결혼하지 마."


물론 저런 하소연을 쏟아내곤 SNS를 자신의 아기 사진으로 가득 채우고, 나에게 보내주기도 하고, 함께 만나면 사랑스러운, 사랑스러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눈빛을 아이에게 보내곤 한다. 즉 그녀들은 엄마이기 이전에 평범한 사람이라는 거다. 자신의 핏줄이지만 그 핏줄과도 하나의 인간관계이기에 자신을 힘들게 하는 존재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 수 있는 사람 말이다. 


두려웠다. 에바 스스로에게도 끔찍한 일이었을 텐데,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을 케빈으로 인해 모두 잃었는데 그녀는 가해자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녀를 향한 차가운 시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 폭행 등을 모두 받아야 했고, 견뎌내야 했다. 내가 그런 상황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것이 두려웠다. 아직 나에게 벌어지지 않은, 하지만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엄마'라는 이유로 말이다. 


'왜'를 찾아가는 과정


커가면서 더욱더 알 수 없는 적대심을 드러내는 케빈의 행동을 보면서 계속 '왜'를 찾았다. 에바와 함께. 다시 사건의 처음으로 돌아가 차근차근 있었던 일들에 대해 되짚어보는 에바를 따라 '왜'를 찾았지만 결코 이 영화에서 '왜'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아이가 엄마의 진한 모성애를 느끼지 못 해서?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아들을 낳은 사람이라고 해서 그녀는 모든 것을 다 잃어야 하는가? 그 어떤 폭행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결국 '왜'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녀는 죄책감을 조금 덜어낸 것처럼 보였다. 처음엔 모두 자신의 잘못이라고,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든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다시 되짚어보면서 스스로를 용서하고 자신을 짓누르고 있었던 '모성애'에 대한 압박감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케빈은 자신의 아들이지만 그것은 변함이 없지만 그래서 끝까지 책임져야 하지만 그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악'이라는 것을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다시 일어선 그녀는 사람들이 칠해놓은 시뻘건 페인트를 벗겨내고 집을 깨끗하게 치우고 아들의 방을 정리했다. 마치 다시 돌아온 케빈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처럼. 그럴 마음의 준비를 끝마친 것처럼. 그리고 케빈을 만나러 갔고, 물었고, 확인한 것이다.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왜 감독은 이런 상황을 만들었을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도대체 케빈이 그런 일을 저지르는 이유를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생각의 생각을 거듭한 끝에 감독은 '왜'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대신 에바에 대해 에바의 삶에 대해 묻게 만들었다. '엄마'라는 존재의 삶에 대해 말이다. 


'엄마'라는 존재에게 강요되는 것들


혼자 만의, 단독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아이를 낳음으로 해서 온갖 희생과 모성애를 강요당하는,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끌어안아야 하는 무거운 책임감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책임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희생과 모성애는 사실 당연하게 생각하기 어려운 부분인 것 같다. 인간이니까. 그것은 의무이기 이전에 감정이니까. 


가끔씩 엄마에게 서운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 서운함 속에는 '엄마라면 당연히'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엄마라면 무조건 자식이 어떤 상황이더라도 진심으로 사랑하고 걱정해야 하는 것'이라고 모성애가 있다면 그것이 마땅한 것이라고 꽤 오랜 시간 동안 생각해왔던 것 같다. 그 생각이 종종 엄마에 대한 서운함을 만들어낸 것이다. 아빠에겐 그렇지 않으면서 말이다. 



이 영화를 통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나 또한 에바와 같을 수도 있고, 또 어떤 누구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인간이니까. '엄마'이기 이전에.




이 시간 이후로 사이코 패스라 불리는 범죄자의 살인 사건에 대한 보도를 접한다면 난 전과 다르게 생각할 것 같다. 무조건 그의 성장 과정, 그의 가족들에 대해 생각하던 것과는 다르게. 이것이 이 영화가 가진 힘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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