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lie Nov 11. 2020

야구장에서 축제를 즐겼던 그 날이 떠올랐다

요즘 생각할 시간이 많아졌다. 불면증으로 늦은 잠을 청하는 날이 많아졌고, 나 혼자서 지내는 시간도 이전에 비해 많이 늘어났다. 코로나와 더불어 내 건강상의 이유로 바깥을 다니는 일이 매우 한정적으로 바뀐 환경적인 변화도 한몫했다. 그리고 오늘, TV 야구 중계를 본 후 잔나비의 '가을밤에 든 생각'을 듣다가 지금보다 좀 더 활동적이고 활발했었던 몇 년 전의 기억들이 연달아 떠올랐다.


최근 진행 중인 프로야구 경기에서는, 예상을 깨고 나의 응원팀이 선전을 하고 있다. 야구팬에게 있어 코 끝이 시린 늦가을의 플레이오프 시즌은 그야말로 축제의 기간이다. 운이 좋게도 나의 응원팀이 가을야구에 수 차례 진출해 나는 꽤 여러 차례 현장에서 가을 야구를 경험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추울지 감당할 수 없는 날씨, 내가 갔던 경기에서 응원팀이 졌을 때의 허탈함, 그리고 보통 밤 10시(물론 그 이후 시간도) 정도는 되어야 경기가 마무리되다 보니 찾아올 수밖에 없는 육체적인 힘겨움이 존재하지만 조금이라도 어렸던 시절의 나는 그저 '축제의 현장'을 즐기고 싶은 마음뿐이었던 것 같다.


2015년 10월 어느 날, 회사 동료와 함께 6시 칼퇴근 후 야구장으로 향했다. 그 날은 비 예보가 있어 우비와 우산을 준비해야 했지만 야구장 가는 길이 얼마나 설렜는지 모른다. 퇴근 시간, 전동차 안의 가득 찬 사람들 속에 있어도 힘들지 않았고 2호선에 사람이 너무 많아 전동차 1대를 보내고 기다려야 했음에도 어쩐지 쉬지 않고 들떠있었던 우리였다.


힘들게 종합운동장 역에 도착하고 분위기를 살펴보니 심상치 않았다. 그 날 경기는 저녁부터 내리던 비로 우천 중단된 상태라고 한다. 여행이 됐든, 야외 공연장이 됐든 기대하고 갔다가 비가 내리면 적지 않게 실망하곤 했었는데 그 날은 뭐가 그렇게 신이 났는지, 기왕 이렇게 된 거 지하철역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천천히 들어가자며 주변을 탐색했다.


우리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로 지하철역 분식집과 편의점 주변은 인산인해였고, 우린 어쩔 수 없이 분식집에서 김밥, 떡볶이를 포장해 출구에서 나가기 전, 지하철 역 땅바닥 어딘가에 주저앉아 신나게 먹기 시작했다. 야구 전문가도 아닌 우리는 경기 결과를 예측하고, 또 지난 경기에 대한 아쉬운 점을 얘기해보며 두둑하게 배를 채웠다.


밥을 다 먹었을 때쯤, 빗줄기가 가늘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천천히 종합운동장역을 나와 야구장으로 향했다. 맥주와 과자를 사서 자리로 가니 경기는 재개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굵어진 빗줄기로 두 번째 우천 중단이 있었다. 운이 좋게도 당시 우리 자리는 비를 피하지 않아도 되는 경계선상에 위치해 이것 또한 추억이라며 자리에 앉아 맥주를 들이키며 회사 얘기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미 늦은 시간 택시를 타고 집에 가야 하는 일정이 확정되었지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 날 비 오는 야구장에서의 우리 대화, 그리고 축제를 즐기려는 사람들 속에서의 우리 모습은 충분히 낭만적이었다.


그렇게 두 번의 우천 중단이 있었음에도 나의 응원팀 선발투수는 8회까지 등판해 130개 가까운 공을 던지고 1실점으로 틀어막았던 레전드 경기를 보여줬다. 결과는 응원팀의 승리.


야구장 현장에 갔을 때의 좋은 점은 그 승리를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즐기면서 진정한 축제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이고, 회사에서 항상 잔뜩 움츠려있던 내가 회사 일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집중하고 환호하고 격하게 감정을 표출하기에 너무나도 적합한 공간에 내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야구 중계를 봤기 때문인지 감성 가득한 잔나비 노래 덕분이었는지 그 날이 유난히 많이 생각났다. 어쩌면 그리웠던 것일 수도 있다. 그동안 조용히 감춰둔 내 감정을 시원하게 분출하고 나왔던 것도 만족스러웠고, 빗속의 오붓한 맥주타임도 즐거웠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지하철역 어딘가에 모르는 사람들과 빽빽하게 앉아 김밥과 떡볶이를 먹으며 다가올 축제를 준비했던 것도 신이 났다. 10월 말이었지만 춥다고 느낄 새가 없었고 그렇게 신나게 축제를 즐기고 와도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을 정도로 나는 꽤 견고한 상태였던 것 같다.


이렇게 회사나 집과 관련된 것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위해 집중하고 열정을 보이며 즐겼던 시절은 분명 있었다. 물론 지금은 내가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다른 어떤 것에 열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신나는 축제는 그 날 이후로 찾아볼 수는 없다. 나는 조금 더 정적으로 변했고, 신중해지기도 했고, 관계에 선을 두는 경우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내가 원하는 대로 혼자 일정을 짜고 행동을 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다.


어떤 것이 더 좋고 나쁜지는 잘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그 날의 기분과 그 날의 감정, 그리고 그 시기의 내 모습이 그리워진다. 그리움이 짙어질수록 내가 다시는 느껴보지 못할 느낌과 볼 수 없는 모습일 것 같아 조금 더 울컥하게 되는 듯하다. 지금이 그렇게 불행하지도, 벗어나고 싶지도 않은 현실이지만, 하루 정도 그 날의 나로 돌아가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다면 그다음 날 현재의 나는 오늘보단 조금 더 만족스러울 것도 같다.


앞으로 당분간은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지낼 것 같은 불안감이 생겼다. 요즘은 그럴 때마다 맥북을 열어 과거 사진을 구경하거나, 그 시기에 한참 작성했던 블로그 글을 찾아보며 추억을 쫓아다니고 있는데, 이렇게 잊고 싶지 않은 특정한 시점 그리고 그때의 내 감정을 고이 접어두기 위한 나름의 노력이라며 위안 삼아 보려고 한다.


이 시간이 지나고, 그리움이 조금 잦아들 때쯤이면, 아마 나는 또 다른 인생의 2막에서 더 즐겁고 황홀한 기억을 나도 모르는 사이 만들어 갈 것 같다. 그래서 지금 가진 그리움이라는 감정, 혹은 과거 언젠가 사람들과 함께했던 축제와도 같았던 시끄럽고 정신없는 가을, 겨울에 대한 추억팔이는 최대한 즐겨도 괜찮지 않을까. (조금이라도 젊은? 또는 활기찼던? 어느 한 때의 아름다움은 누구나 간직하고 싶어 하는 법이고 곁에 두고 싶어 할 테니까.)



 



 



작가의 이전글 이럴 땐, 적당히 해도 괜찮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