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릇한 자연이 빛을 한가득 머금는 시간, 어디까지가 끝인지 가늠도 안 되던 새파랗던 바다가 거울이 되어 빛을 반사하는 시간, 태양이 수평선 너머로 고개를 숙이기 전에 자신을 온 세상에 보여주는 시간. 그 시간을 가만히 바라보는 한 소녀가 있다.
광활한 바다에 뭐든지 삼켜버릴 기세로 달려오는 파도 소리만 들릴 뿐, 소녀 외에 온기가 느껴지는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소녀의 이름은 해수. 새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에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얇은 손목과 발목, 작은 바람에도 휘청이는 몸이 거센 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가 버릴 것 같다. 해수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고,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는 바람에 다 엉켜버렸다. 비틀거리는 몸으로 한 발, 한 발, 바다를 향해 나아가 가만히 바라본다.
‘이걸 보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린 걸까….’
집 밖으로 나오는 데 성공하자마자 해수는 무작정 바다가 있다는 곳으로 내달렸다. 처음으로 달리면서 느끼는 시원한 바람에 왠지 모를 해방감을 느끼며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 워낙 달리기를 많이 안 해본 터라 조금만 달려도 금세 숨이 가빠졌고, 그만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바닥에 나뒹굴었다. 무릎과 손이 아스팔트에 쓸리면서 상처가 나고, 숨이 턱 밑까지 차서 토할 것 같았지만, 해수는 이전에 듣지 못했던, 자신의 귀까지 쿵쾅거리며 요동치는 심장 소리에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꼈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여기서 멈출 수 없다는 생각에 힘겹게 일어나 다시 바다를 향해 달렸다.
해수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의 통제 속에 자랐다. 작은 바람에도 금세 기침을 하고 열이 나서 아주 잠깐의 외출도 조심해야 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삶조차 해수에게는 특별한 일들이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에는 나가지 못했고, 추워질수록 집안에서만 생활하는 삶이 많아졌다. 여행은커녕 그 흔한 소풍 한 번 가보지 못했고, 해수가 만들 수 있는 눈사람은 색연필로 만드는 눈사람뿐이었다. 한창 친구들과 바깥에서 뛰어놀아야 할 나이였지만, 몇 번 학교에서 쓰러지는 일이 생긴 뒤, 홈스쿨링을 시작하면서 딱히 친구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해수의 건강을 위해 한적한 시골의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했고, 해수는 집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풍경 사진을 보면서 그림 그리기, 뜨개질하기, 독서하기 등등 많은 것들을 시도했다. 하지만, 집에서 그 어떤 재미난 일을 해도 해수는 바깥세상이 더 궁금했다. 영화나 드라마로 보는 세상은 신기한 것들 투성이었고, 실제로 보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해서 그간 몇 번의 탈출시도도 했다. 자는 척하다가 몰래 창문으로 나가서 밤공기를 마시며 산책도 해보고, 가족들 다 같이 외출을 하면 화장실 다녀온다고 하고 주위를 더 돌아다니다가 오는 등 조금씩 세상을 맛보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해수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해수는 더 큰 세상을 마주하고 싶었고, 모든 것들을 느끼고 싶었다.
특히, 바다가 보고 싶었다. 종종 해외여행을 갔다가 기념품을 사 오는 여행작가인 이모가 이야기해 주는 바다는 특별해 보였다. 따지고 보면 다 하나로 이어진 같은 바다, 같은 물인데 지역마다 나라마다 투명한 정도와 색, 느낌이 다 다른 게 신기했다. 이모는 바다를 보면 그 어떤 고민과 생각도 다 날아가버려서 머릿속이 비워지고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해수에게 말했다. 바다를 좋아하는 이모 덕에 해수는 소라껍데기 속 바다의 소리도 들어보고 각종 조개껍데기와 바다와 관련된 기념품들을 모으며 언젠가는 자신도 꼭 바다를 온몸으로 맞아보리다 다짐을 했다.
그렇게 혼자만의 자유를 꿈꾸던 해수가 어느덧 18살이 되었고, 부모님의 통제에 지쳐 벗어나고 싶었다. 해수의 부모님은 나가고 싶어 하는 해수의 마음을 알았지만, 몇 번 응급실에 갔던 일이 마음속에 크게 자리 잡아 해수를 통제할 수밖에 없었다. 크게 사춘기도 없이 반항하지 않는 해수를 보며 다행히라 생각할 뿐, 해수의 계획은 생각하지도 못했으리라.
어느 날 아침, 해수가 늦잠 자는 걸 확인한 부모님이 방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해수가 일어났다. 커다란 인형을 이불속에 넣어두고 조심스럽게 창문을 열어 나갔다. 거실의 창문에서 보이지 않게 마당을 오리걸음으로 걸어가 뒷문으로 나가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무작정 앞으로 달렸다.
열심히 달리고 달린 끝에 저 멀리 파란색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처음으로 직접 두 눈으로 바다를 보게 된 것이다. 실제로 마주한 바다는 직사각형의 티비 안에 담아낼 수도 없이 드넓은 곳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과 저 멀리 보이는 수평선, 바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해수는 처음으로 ‘자유’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파도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만 나아간 만큼 다시 뒤로 밀려났다. 하지만, 한 번 시도해서 실패나 좌절을 맛보고 돌아서는 사람들과 달리 어떠한 불평도, 불만도, 포기도 없이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마치, 나 같네….”
해수는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모래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렸지만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해수는 집 앞 텃밭에서 보던 축축한 흙과 달리 건조하고 고운 모래가 신기했다. 손으로 모래를 잡으려 강하게 주먹을 쥐었지만, 밀가루처럼 고운 모래는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 버렸다. 이번에는 양손으로 살포시 모래를 산처럼 모아서 들어 올렸다가 떨어뜨렸다. 해수의 손에서 떨어진 모래를 바람이 눈처럼 날려 보냈다. 날아간 모래가 아쉬운 듯 해수는 한참을 손에 남은 모래알갱이를 만지작거리다가 그대로 누워버렸다. 태양이 하늘을 수채화처럼 핑크빛으로 물들였고, 그 위에 구름이 뭉게뭉게 바람을 타고 천천히 이동했다. 항상 집에서 누우면 보이는 하얀색 천장처럼 백지일 것 같은 미래가 핑크빛으로 바뀐 것만 같아서 해수는 푹신한 침대보다 사각거리는 모래에 누워있는 지금이 더 편안하다고 느꼈다. 바닷물이 일정한 주기로 모래를 만나 하얀 거품을 만들며 부서지는 소리에 해수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안정을 찾아갔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일어난 해수가 모래에 신발을 벗어두고 바닷물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파도가 어서 들어오라는 듯이 해수의 발을 간지럽히고 도망갔다. 온몸이 쭈뼛 서는 처음 느껴보는 차가운 온도에 해수는 순간 겁이 났지만, 저 멀리 보이는 태양에 이끌려 천천히 바다로 들어갔다. 깊숙이 들어갈수록 거세지는 파도에 해수의 몸이 휘청거리며 뒤로 밀려났지만, 해수는 굳은 결심이라도 한 듯 파도에 맞서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한 발, 한 발 닿았던 바닥이 어느샌가 훅 꺼지며 닿지 않았다. 꼬르륵. 해수의 머리까지 물에 잠기고 바다가 잠잠해졌다.
“푸-하”
물 위로 올라온 해수가 기침을 연신 콜록거렸다. 오른쪽에는 이미 멀어진 해수욕장과 왼쪽에는 아직 아름답게 빛나는 태양이 보였다. 해수는 해수욕장을 한참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태양을 바라보고 지금껏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던 세상을 향해 힘껏 헤엄쳐갔다.
자연이 빛을 다 빼앗긴 시간, 파랗던 바다가 하늘의 별들을 비추는 시간, 빛을 뿜어내던 태양이 고개를 숙이고 은은하게 빛을 내는 달이 떠오르는 시간. 파도 소리만 들리는 밤바다. 해수마저 떠난 밤의 바다는 더욱 쓸쓸했다. 해수가 벗어놓은 신발에 남아있던 온기마저 바람이 날려 보내고 광활한 바다에 아무런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해수가 남겨놓은 흔적은 그저 해수욕장에 굴러다니는 쓰레기처럼 보였고, 유일한 목격자인 바다만이 진실을 알고 있을 뿐 그 누구도 해수를 보지 못했다. 그렇게 해수는 아무도 모르게 자신만의 세상을 향한 항해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