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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별 May 01. 2024

고백

올해는 '고백의 해'라고 이름 지었다. 평생 하지 못 할 것 같은 이야기를 산속에서 꺼내었고 서로 얼굴을 모른다는 익명의 그림자에 기대어 글도 썼다. 그 느낌은 뭐랄까, 뱃속이 시원해지는 맛이었다. 나는 장이 시원찮다. 주로 묽은 변이 나와서 불편한 날이 많다. 먹어도 장에서 충분히 흡수되지 않는다. 뱃속이 자주 부글거리고 신경이 곤두선다.


그런데 산에서 아버지와 남편이야기를 내어놓고 한동안 아랫배가 가벼웠다. '뱃속이 편안하다는 게 이런 거구나'생각했다. 그러자 더 편안해지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우아하게 말하면 무의식에 단단히 묶여있는 이야기를 의식으로 더 많이 밀어 올리고 싶어진 거다. 가끔 밤이 깊은 날 혼자서 미끌거리는 덩어리를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 토하고 싶지만 토할 수 없는 기분이고 혼자라는 고독감에 뼈가 시리곤 했다.


'괜찮다. 괜찮다. 나는 괜찮다'는 내가 나에게 거는 주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괜찮지 않았다. 아버지가 싫었고 남편은 견디기 힘들었다. 그런데 정확한 이유는 알기 힘들었고 먹구름처럼 무거운 감정에 목이 졸리는 것 같은 기분만 들었다. 그 무거움을 밖으로 꺼내 달래는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간혹 떠오르는 이유와 맥락은 목소리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무거운 감정이 담긴 상자 뚜껑을 열면 무시무시한 것이 나올 것 같았다. 떠올리면 머리카락이 쭈뼛거렸고 몸에는 한기가 돌았다. 분명히 상대가 시작한 잘못인데 오랫동안 끌어안고 있다 보니 내가 잘못한 것 같은 착각도 일어났다. '나 때문이야'라는 목소리가 종종 들렸다. 구렁이가 몸을 칭칭 감은 것 같은 느낌 덩어리는 오직 나만이 알아차리고 해결해야 했다. 타인이 찾아줄 수는 없었다. 그걸 보아내기 힘든 날은 쇼핑을 하거나 밥을 많이 먹었다. 필요 없는 물건을 사고 배가 부른데도 부엌을 서성이며 손으로 허연 쌀밥뭉치를 삼켰다.


산에서는 그 끄덕한 덩어리들이 목구멍을 긁고 성대를 울려 말이 되었다. 그것들이 밖으로 나왔다. 의식으로 끌어올려진 기억들은 조금씩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나를 누르던 무거움도 옅어졌다. 산속에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다정하게 안아준 인연들이 고맙다.




세상이 내게 다정하게 말 걸어준다. 조금씩 맛보는 오늘이 달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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