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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별 Jun 19. 2024

복숭아

월요일에 남편이 복숭아를 한 박스 들고 왔다. 달다. 너무 맛있었다. 한 자리에서 대여섯 개를 먹었다. 혈당이 폭주하는 맛이다. 유월은 덥고 습하다. 기운이 떨어지는 초여름날 달달한 놈을 먹으니 꿀맛이었다.


나는 당뇨 전단계이다. 어릴 적에 베체트도 앓았다. 10여 년 전 한의원에서 식이요법을 할 때 사과, 배, 귤만 먹으라고 했다. 다른 과일은 체질에 안 맞다고 했다. 사과. 배. 귤은 늦가을에 수확해서 겨울까지 먹을 수 있다(저장사과가 초여름까지 나오기는 한다). 어쨌든 겨울부터 쏟아져 나오는 딸기, 봄이면 나오는 참외, 초여름이면 시장에 나오는 복숭아, 자두, 살구, 포도, 수박 등등을 먹을 수 없다는 진단이었다. 나는 복숭아나 딸기를 한두 쪽만 먹는 사람이 아니었다. 앉은자리에서 한 박스를 먹어 치울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바로 누워서 자는 태도까지 겸비했다. 이런 몸을 가진 사람이 끝이 좋을 수가 없다. 몸에 좋은 음식과 동보다 더 중요한 건 몸에 나쁜 음식과 자세를 버리는 일다. 혈당을 확 올리는 과일을 끊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다른 사람이 과일을 먹으면 민망하게 계속 쳐다보기도 했다. 과일을 끊고 나서 몸이 생각보다 좋아졌다. 과일이 체질에 안 맞다거나 과일이 나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과일 한 두쪽이 얼마나 나쁘겠나? 하지만 귤 한 박스를 통째로 먹을 수 있는 간식 배는 심각한  상태였다. 흰쌀밥으로 삼시 세끼를 먹고 과일까지 한 양푼을 먹으면서 몸이 좋기를 바라는 건 공부 안 하고 백점맞고 싶은 심보였다.


정신줄을 놓고 복숭아를 먹고 나니 속이 메스꺼웠다 요즘 나오는 신비복숭아는 이름대로 신비한 맛이었다. 설탕에 잔뜩 조린 황도 통조림 맛이 났다. 술 마신 것처럼 몽롱해져서 일찍 잤다. 자고 일어나서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고 눈은 풀려 있었다. 그 많은 과일당을 소화시키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인슐린을 퍼내느라 애쓴 내 췌장은 또 어쩌나...(췌장에 늘 염증이 있는 편이다) 지금은 알아주기라도 하는데 예전에는 입으로 넣고 잠만 잔 주인이 아주 힘들었을 거다.


이 멍청함을 벗아날 방법은 운동밖에 없다. 일찍 일어난 김에 새벽 달리기 교실로 갔다. 새벽에 모인 언니들은 유쾌다. 타인의 에너지에 기대어 다리를 질질 끌면서 억지로 운동했다. 1시간을 헐떡거리면서 움직였다. 혈당이 내려가고 간신히 눈동자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제 좀! 한 개만 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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