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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별 Aug 24. 2024

늦여름날

8월 중순이다.

여름 내내 달구어졌다. 땅은 열을 차근차근(?) 품고 있다가 사정없이 내뿜는다. 모든 길이 후끈하다. 건식 사우나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땅에서 올라온다. 하늘에서는 태양이 작살처럼 내리 꽂힌다.


어제는 도서관에서 책을 한 권 빌리고 경찰서에서 면허증도 찾았다. 나선 김에 봐두었던 카페도 다녀왔다. 커피맛이 좋았고 공간은 차분했다. <<프로이트와 융의 편지>> 마지막 장을 읽었다. 정신분석이라는 새로운 길을 함께 가던 두 사람이 소원해지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헤어졌구나...' 씁쓸했다. 좋아하던 사람과 헤어지는 일은 무척 힘든 일이다.


며칠 전 일이다.

그날도 아침부터 몹시 더웠다. 얼음 동동 뜬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동네에 부부가 운영하는 카페가 있는데 드립이 일품이다. 적당히 편안한 옷을 입고 마실 가듯 들어갔다.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에티오피아를 골랐다. 주문을 마치고 의자에 털썩 앉았다. 1층에는 넓은 통창이 있다. 지나가는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기 좋다.


장바구니를 끌고 장을 보러 가는 아주머니가 있다. 무얼 사러 가는 길일까? 할아버지가 짐자전거를 느릿하게 끌고 가기도 한다.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젊은 청년이 곱다.


그날은 한 할머니가 유독 눈길을 끌었다. 할머니 얼굴에서 잘 익은 복숭아빛 미소가 배여 나오고 있었다. 보통 어른들은 무표정하거나 지친 얼굴이다. 주름이 깊게 파여 세월이 무겁게 느껴지는 분들도 있었다. 그 할머니는 아니었다.


허리춤에 지팡이를 가로로 길게 올리셨다. 양손을 지팡이 위에 척 올려놓고 걸으셨다. 아래에는 품이 넉넉한 꽃무늬 바지를 입고 계셨다. 신발은 깔끔하게 닦은 흰색 고무신이었다. 바지에는 분홍꽃, 흰색꽃, 초록잎이 가득했다. 화사한 색상의 블라우스를 입으셨는데 무슨 색이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뙤약볓 아래에서도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할머니의 미소는 아이처럼 고왔지만 아이의 것은 아니었다. 할머니의 미소는 짜고 매운맛, 무거운 맛, 두려움의 맛을 건너온 사람의 것처럼 보였다. 할머니의 그림자들이 오늘을 만들어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고운 옷을 입고 지팡이를 흔드는 할머니도 헤어짐을 겪었을까? 어떤 날은 좋았고 어느 날은 힘들었겠지...


며칠 전 만나고 온 엄마는 힘들다고, 00이 싫다고 한참 동안 목을 긁는 소리를 내었다. 그 음성은 오래된 톤인데 귓가에 맺혀 고막을 찢는 느낌이다. 이야기 진행은 언제나 똑같았다. 그리고 엄마가 나에게 듣고 싶은 말은 딱 하나이다.


 '우리 엄마가 제일 불쌍해... 엄마, 내가 엄마를 꼭 지켜줄게!'




내가 엄마에게서 듣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거였다.


"오늘 참 재미있었다!"

"오늘 00 할머니랑 잘 놀았다."


잘 익은 행복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걸까? 그 할머니를 따라가서 물어볼걸 그랬다.


"할머니, 오늘 어디 가세요? 너무 좋아 보이세요! 오늘도 재미나게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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