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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베트 Apr 02. 2020

바이러스와 좀비의 생존 방식

[Quaranta Storie]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에서 

▲ 페어플레이 정신 없는 우한 바이러스  


바이러스의 창궐로 세상이 잠시 멈췄다. 겨우내 들려오던 중국의 암울한 소식은 이제 전세계의 소식이 됐다. 도시는 텅텅 비었다. 식품점 진열대도 텅텅 비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종말론적 풍경을 내 살아생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책이나 영화 덕분에 이런 풍경이 완전히 낯설진 않다. 사람들은 이미 이런 종말론적 세계를 어느 정도 예상하거나 각오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지난 세기부터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온 대중문화 좀비들이 바로 그것이다. 좀비는 생명체가 아니면서 다른 생명체들을 위협한다.


이 코비드19, 즉 ‘우한폐렴’을 옮기는 것도 엄밀히 말해 생명체가 아니다. 생물학에서는 무엇보다도 세포로 구성된 조직을 생명체라 부른다. 바이러스에는 세포가 없고, 따라서 호흡이나 물질대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생명체의 세포에 기생한다.


바이러스에는 생식능력도 없다. 무성생식이든 유성생식이든 생식능력은 생명체가 갖는 고유한 구실이다. 바이러스의 번식 방법은 생식이 아니라 복제라 불린다. 바이러스는 다른 생명체의 DNA나 RNA 등을 이용하고 조작해서 자기들이 번식할 유전물질을 만들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바이러스가 생명체 없는 곳에선 이내 소멸되는 까닭이다.


강력한 세포살상능력을 가진 대신 생명체의 직접적인 접촉이 없을 경우 웬만해서 전염되지 않는 게 바로 HIV 등 주로 성병을 옮기는 바이러스들의 '페어플레이' 룰이었다.


그러나 코비드19를 일으키는 이 코로나바이러스에겐 원산지 국가의 정부와 매한가지로 그런 페어플레이 정신 따위 없다. 일반적으로 플라스틱이나 종이에선 평균 5일 생존한다고 한다. 며칠 전 신문에선 최근 코비드-19 환자가 발생하며 격리됐던 한 크루즈선에서 물체 표면에서 최소 17일까지 살아남은 바이러스를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 사람들은 왜 좀비에 열광했을까


한 마디로, 바이러스는 좀비와 닮았다. 생물도 무생물도 아닌 것이 먹지도 않고 숨쉬지도 않으면서 질기게 살아남아 살아있는 사람들을 숙주로 삼아 번식하고, 감염된 사람들을 매개체로 삼아 새로운 숙주로 삼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좀비가 할리우드의 단골 소재가 되기 시작한 건 생각보다 오래 전이었다. 최초의 좀비 영화가 만들어진 게 무려 1932년이었다. 대공황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때다. 개인적으로 좀비가 최초로 대중문화에서 크게 대두된 것은 마이클 잭슨의 Thriller 뮤직비디오부터였다고 본다. 이후 좀비 영화는 공포영화의 주류가 되기 시작했다. 좀비 영화는 하도 많아서 성공작만 생각하더라도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다.


도대체 왜 현대인들은 좀비 영화에 그렇게 열광하는 걸까? 어째서 좀비가 그 어떤 괴물이나 유령보다 더 무섭다고 생각하는 걸까? 하긴, 좀비가 실재한다면 나 역시 좀비를 그 어떤 괴물이나 유령보다 더 무섭다고 생각할 것 같다.


대개의 설정에서, 몸을 가루로 만들지 않는 이상 아무리 총을 쏘고 팔다리를 베어내도 좀비는 움직일 수 있다. 살아있지 않으니 감정도 없고 고통도 없고 따라서 공포도 없다. 바로 그것이 그들을 끔찍히 공포스러운 존재로 만든다.


또한 좀비는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또 다른 희생자를 만들어 그 사체를 이용하기만 하면 된다. 그나마도 의식하고 하는 게 아니다. 그 배후에 사악하고 유능한 강시술사가 있어서 어떤 원대한 세계정복의 계획을 갖고 있는진 몰라도 말이다.


▲ 좀비로 사는 게 더 쉽지만


생명체로 사는 일은 고단한 일이다. 끊임없이 먹고, 소화하고, 흡수하고, 배설해야 한다. 숙주에게 기생해 가장 중요한 요소인 유전물질만 쏙 빼서 복제하는 바이러스의 삶은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쉬워 보인다.


생명 있는 영혼을 갖고 사는 것도 고단한 일이다. 끊임없이 배우고, 생각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 독립적이어야 한다.


독립적인 영혼으로 사는 게 힘들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곧잘 우상을 만든다. 그리고 그 우상의 지시에 따른다. 그 우상이 그들의 강시술사인 것도 모르고, 주변 사람들을 숙주 삼아 그들의 단순하되 독성 있는 사상을 전파한다.


이것이 사상에만 그치면 좋은데, 그렇지 않다. 이 독성 있는 사상은 모든 물질대사, 즉 경제활동에 큰 영향을 끼친다. 모두가 바이러스가 되려고 한다. 아무도 생명활동을 하려 들지 않는다. 무언가 만들거나 건설하는 건 천한 ‘생명체’들이나 하는 일이다.


그러니 모두가 그저 책상 앞에 앉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시간만 떼우며 월급 받을 일을 구한다. 이건 대한민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선진국이나 후진국이나 모두 포퓰리즘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잘 사는 나라는 잘 사는 나라대로, 못 사는 나라는 못 사는 나라대로 결과의 평등만을 추구하고, 정치인들은 그런 국민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바쁘다.


지난 세기부터 이어온 좀비 영화의 ‘창궐’은 아마 인간 무의식의 반영일 것이다. 지금 좀비 같은 바이러스가 전세계를 뒤덮었다. 무섭고 걱정되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리가 아닌 개인으로 은신하면서 세상과 자신에 대해 성찰하고 성장할 기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좋은 기회를, 나나 많은 사람들은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서성대고 있다. 사람이 그리워서, 혹은 좀비들이 인터넷을 통해 퍼뜨리는 독을 막아보려고.


이 인터넷이라는 공간엔 방역이란 게 없다. 우리는 그저 자신이 갖고 있는지 아닌지도 모를 항체에만 의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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