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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베트 Feb 06. 2022

소통과 생명

[시네마 뒷북] 1917 


전쟁 게임이라면 모를까, 전쟁 영화는 사실 별로 안 좋아합니다. 게임의 경우 전략시뮬레이션은 해도 FPS(일인칭 슈팅게임)는 거의 안 했습니다. 전쟁에선 인간이 나약한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현실을 굳이 상기하고 싶지 않았던 거죠. 


------ 1917 ------


1917년은 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 부근에서 실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1차대전 기간 유럽 전역에서 수많은 전투가 일어나고 종족학살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은 1차대전이라는 말에서 프랑스 전선의 참호전을 먼저 연상합니다. 그만큼 참호전은 1차대전의 상징이 됐습니다. 


대구경 곡사포와 전차 덕분에 실제 전투는 참호속에서 대기하는 시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아주 잠깐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참호 속은 마치 지옥으로 떨어지기 전 대기하는 연옥과 같았습니다. 병사들은 그 더럽고 축축한 참호에 런던이나 파리의 아름다운 거리 이름을 붙였습니다. 


무엇보다도 무전기가 전쟁에 도입되기 전이었습니다. 명령이나 지시는 그 긴 참호 속에서 사람을 통해 전달됐습니다. 전선에서 전선으로 명령을 전달하는 데도 사람 말고는 달리 매개수단이 없었습니다. 


영화는 참호속에서 한 영국 장교가 블레이크, 스코필드라는 두 명의 일병을 부르면서 시작됩니다. 장교는 몰살이 예상되는 다른 대대의 작전을 중단시킬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 누구의 영역도 아닌 혼란스러운 지역을 가로질러 가서 직접 손으로 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더욱이 그 대대에는 블레이크 일병의 형이 복무하고 있습니다. 두 명의 일병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참호밖으로 나갑니다. 참호 밖은 지옥입니다. 한참 꽃이 피고 들판이 푸를 4월의 들판엔 진흙과 시신이 어지럽게 얽혀서 썩어가고 있습니다. 


아직 십대처럼 보이는 두 명의 일병은 다음날 아침이 오기 전까지 그 사지를 건너 천육백 명 한 대대의 헛된 죽음을 막아야 했습니다. 


1차 대전 기간 세상은 많이 변했습니다. 처음으로 비행기가 작전에 투입됐습니다. 최초의 전차가 탱크라는 이름으로 나타났습니다. 수많은 대규모 전투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젊은이들을 잃은 영국은 처음으로 징병제를 도입합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데로 무선통신은 아직 전장에 나타나기 전이었습니다. 무전기가 전쟁에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1919년부터였습니다. 정찰병이나 정찰기를 내보내더라도 그들이 살아돌아오지 않는 이상 적의 동태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대응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수많은 문학작품과 영화가 1차대전의 참호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이야기합니다. 참호 안의 비위생적인 상태, 추위와 더위, 그리고 폐소공포증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참호 밖이 즉각적인 죽음을 의미한다면 참호 안은 서서히 죽어가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참호 안에는 아군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옆 병사에게 정보를 전달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참호 밖으로 나오는 순간 두 일병은 사람들로부터 아무런 정보도 전달받을 수 없게 됩니다. 


소통이 단절되는 겁니다. 그 소통의 매개자인 두 사람의 움직임은 대부분 롱테이크로 촬영됩니다. 


그나마 빛이 있을 때는 스스로 보고 판단할 방법이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코필드 이병은 낮의 그 귀한 시간을 실신한 채 거의 다 낭비해버리고 암흑 속에서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이따금  조명탄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조명탄은 독일군들에게 영국군 이병의 위치를 알려주는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길을 알려준 것은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프랑스 아가씨였습니다.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가는 건 다른 문제였습니다. 더욱이 죽음으로 향하는 길은 분홍빛 꽃잎으로 덮여있었지만 생명으로 향하는 길은 썩어가는 시체들로 막혀 있었습니다. 젊다 못해 어린 이병은 거기서 아주 잠깐, 차라리 그냥 죽는 게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듯 보입니다. 


사회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죽음이란 결국 타인들 그리고 내 몸과 영원히 단절되어 더 이상 소통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일시적 단절은 고통스럽지만, 영원한 단절 즉 죽음은 그래서 어떻게 보면 편한 선택이고 도피입니다. 


하지만 사는 건 원래부터 고통입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뇌는 깔끔한 죽음보다는 추하고 역겨운 삶을 선택하도록 구성됐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걸 영광으로 여기게끔 훈련됩니다. 


영화 속 두 이병은 일차적으로는 전쟁영웅이고, 이차적으로는 끝내 살아 도착한 메신저이자 메시지입니다. 


그 두 이병은 마치 사람들이 뱉는 말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하루에서 수없이 많은 말을 하고 살아가지만 살아 도착해서 상대방 마음에 생명을 주는 말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의 말은 그저 상대방 마음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어버리거나, 혹여 도착하더라도 상대방 마음에 독이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전파라는 매개체가 사용되기도 전 일이었습니다. 사지를 건너 살아 도착한 한 젊은이가 수 천의 헛된 죽음을 막아내는 이야기가 오늘날 유효한 건 그저 역사학이나 전쟁사 딜레탕트 놀음 때문이 아닐 겁니다. 


바로 소통으로 죽고 사는 인간들과 인간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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