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에 걸렸습니다. 이렇다 할 이유가 없었는데 감기에 걸렸다는 건, 몸이 아파서가 아니라 계절에 적응을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때가 아마 초여름이었으니 새벽 날씨는 아직 봄을 타고 있었나 봅니다. 감기에 걸리면 가끔 꿀물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뜨거운 물에 꿀 한 스푼 넣고 살살 돌리면 꿀 향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첫 입을 대는 순간에는 맛있다거나 따듯하다 보다는 오히려 꿀물 타 주고 싶다, 라는 마음이 듭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겐 매일 만들어 주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추위를 많이 타기도 하고 또는 더위를 많이 타기도 하고 심지어 누군가는 겨울 감기조차 걸리지 않는 사람인데 그 사람들이 제가 탄 꿀물을 맛있게 먹어줄까요. 아프지 말라고 주는 꿀물이 효과가 없으면 어쩔까요. 그 물의 온도는 분명하게 따듯한 거라 그래도 잘 먹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이런 잔잔한 마음은 꿀물 안에 잘 녹아들었을까요.
감기약을 사러 약국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좋아하던 체크남방을 입고 슬리퍼를 질질 끌었습니다. 초여름의 날은 선선했지만 몸은 으슬으슬 떨렸습니다. 여름 감기에 걸렸습니다. 훌쩍거리며 도착한 약국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장님이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는 건가 싶어 의자에 앉아 기다리다가 진하게 나는 약국 냄새에 숨을 들이마셨습니다. 그곳은 그곳만의 향이 있습니다. 한약 냄새인지 아니면 탄 대추 냄새인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달달하진 않은데 그렇다고 엄청 쓴 것도 아닌 것이 오히려 몸에는 좋은, 그런 향. 어릴 적엔 이런 냄새를 참 싫어했는데 이젠 오히려 포근합니다. 향이 진득할수록 약효가 뚜렷할 거라는 생각에 그렇습니다.
딸랑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사장님이 아이 손을 잡고 같이 들어옵니다. 죄송하다며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말에 둘을 슬쩍 보았습니다. 눈이 똘망똘망한 게 사장님을 많이 닮았구나 싶었습니다. 사장님은 약국 근처에서 놀고 있던 아이를 데려온 것 같습니다. 싱글벙글 웃고 있던 아이는 할 말이 많아 보였는데 어딜 다녀온 걸까요. 봄꽃을 보고 온 걸까요. 여름 나무를 보고 온 걸까요. 흙이 잔뜩 묻은 옷을 탈탈 털어주며 아이에게 오늘은 뭐하고 놀았는지, 간식은 뭘 먹었는지 묻고는 저녁에 초코라는 강아지와 산책 가자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홍삼젤리를 뜯어 아이에게 주는 모습에 저걸 먹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놀랍게도 그 아이는 싫은 티 하나 내지 않고 야금야금 잘 먹었습니다. 쓴 약을, 그것도 홍삼 맛을 싫어했을 법도 한데 쪽쪽 빨아먹는 모습에 오히려 맛있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 아이는 분명 마음만큼은 건강하겠구나, 사랑받는 느낌을 많이 받겠구나 싶었던 거죠. 사장님은 죄송하다며 나에게 증상을 묻고 감기약에 대한 설명을 해주시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를 챙겨주는 마음이라, 누군가를 생각하는 마음이라, 약이란 건 어쩌면 몸보다는 마음에 효과가 더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사실 몸이 아프면 약을 먹는 것이 맞지만 가끔은 따듯한 꿀물 한 잔이면 괜찮아지겠지 싶습니다. 감기약만 먹으면 졸음이 찾아오기도 하고, 이게 정말 효과가 있나 싶기도 한 날들을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그럼 마음의 약은 어떨까요. 이건 확실한 효과가 있을까요. 가끔, 아주 가끔은 제가 그 약국이 된 것도 같습니다. 누군가 상처를 받았거나 힘이 들 때 저를 찾아오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저는 이 사람에게 따듯한 꿀물 한 잔이나 제대로 된 약을 줄 수 있을까, 내가 정말 치유를 해줄 수 있는 걸까 싶은 마음이 듭니다. 워낙에 아픈 사람을 보기 힘들어하는 성격이라 영양제를 나눠 주는 일이 많았는데 이건 아프지 말라는 마음이기도 하고 아파도 덜 아파달라는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나아지게 하는 약도 아니고 처방해줄 수 있는 약사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 마음의 약이란 건 어쩌면 어디에나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스트레스가 쌓여 입이 삐죽 나온 날에는 달달한 초콜릿을 준다던가, 괜히 울적해보이면 따듯한 차 한 잔을 내준다던가, 날이 좋은 날에는 드라이브나 하자며 먼저 다가가는 것 말입니다. 별 거 아닌 것에 마음을 담으면 그건 별게 맞습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려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 사람이 완전히 치유가 된다면 저는 더 이상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조금 더 따듯하게 대해줄걸, 조금 더 들어줄걸, 더 꽉 안아줄 걸 하며 모든 게 끝나갈 때 즈음엔 뭘 해도 후회하겠지만, 조금 덜 후회하고 싶다는 마음이라 괜찮습니다. 그래야 제가 아프지 않습니다. 어쩌면 저는 제 스스로를 챙기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꿀물의 비율은 10:1이 좋다고 합니다. 제가 만든 꿀물은 그 비율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봤습니다. 아마 10은 애정이겠고 1은 간절한 마음이겠습니다. 아프지 말라는 마음에, 진하게 한 잔 타 주고 싶은 날에는 늘 내 옆에 있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