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새해를 들어서며 결심했다. 수영과 운전을 정복하겠노라고. 이 두 가지는 어느 정도의 운동신경과 신체적 자신감을 요구하기에 오래도록 망설여왔던 것들이다. 하지만 이제는 더 미룰 수 없었다.
수영.
나와 물의 관계는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물에 대한 공포심이 생긴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기억이란 참으로 이상한 것이다. 좋은 기억들은 희미하게 지나가는 반면, 나쁜 기억들은 매일같이 더 선명하게 떠오르니 말이다. 그날 이후, 나에게 물은 두려움 그 자체가 되었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유리라는 친구가 있었다. 이 글을 쓰다 보니 억지로 기억해낸 것도 아닌데, 네 이름과 함께 동그란 얼굴, 분홍색 안경, 달걀처럼 매끈한 이마까지 자연스레 떠오른다. (악의는 없는데, 참 뭐랄까 좋지도 않았던 그저 그런 아이.)
김영란 법이 없던 그때는, 스승의 날 선물이 그리 금기시되지 않았다.
나는 담임 선생님께 작은 머리핀을 선물로 드렸다. 물론, 이건 엄마가 준비한 것이었고, 철저히 날 잘 봐달라는 의도가 담긴 일종의 청탁 선물이었다. ‘우리 아이 1년간 잘 부탁드립니다.’라는 모성애가 담긴 작은 제스처랄까.
그런데 그 애는 그걸 보고 어딘가 분했던 것 같다. 스승의 날이 지나고 나서 선생님께 따로 편지를 썼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편지 말미에 ‘선생님, 저도 예쁜 삔을 꼭 드릴게요.’라는 말을 덧붙였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유리는 꼭 날 따라해야 직성이 풀리는, 조금 이기적인 아이였다. 내가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면, "나도 그 점수 받을 수 있었는데 이번엔 네가 운이 좋았던 거야." 같은 말을 하곤 했다. 그 말을 1년 내내 반복하며, 내 성취를 은근히 깎아내리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지금 와서 내 성격을 되짚어보면, 조용하고 숫기 없었던 나는 외향적인 아이와 어울리면 성격이 변할 거라고 믿었고, 그런 친구와 놀아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유리는 수영을 잘했다. 그리고 어느 날 나를 성인 풀장으로 끌고 갔다. 가기 싫다고 말했지만, 그는 초등학생이 유아 풀장에서 노는 건 우스운 일이라며 나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 순간 나는 거부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이기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너도 할 수 있어.”라는 유리의 말에, 나는 용기를 내어 물속으로 들어갔다. 초반에는 괜찮았다. 내 키와 비슷한 높이의 물속에서 천천히 걸어가며 나름의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변수가 찾아왔다. 중간쯤에 이르자 발이 닿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호흡이 엉켰다. 물이 내 몸을 감싸며 균형을 흔들었고, 까치발로 선 채 겨우 버티던 나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주변에서 출렁이는 물결이 나를 더 깊은 곳으로 끌어당기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공포에 사로잡혀 발버둥치던 그 짧은 5초는 내게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겨우 수영장 끝의 난간을 붙잡고 나서야 간신히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 물은 나에게 단순한 액체가 아니라, 발을 닿지 않는 깊은 곳으로 끌어당기는 두려움의 상징이 되었다. 발이 닿지 않는 수심에 대한 공포, 나를 삼켜버릴지도 모른다는 미지의 불안이 나를 옭아맸다.
나는 본래 나 자신에게 관대하지 않은 편이다. 인간이 의지만 있다면 무엇이든 극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굳게 믿고 있으니,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엔 언제나 예외가 존재한다. 그리고 유년의 두려움이야말로 그런 예외 중 하나일 것이다.
어릴 적 두려움이란 것은 자연재해처럼 예고 없이 들이닥친다. 그때의 감정은 복잡하고 세세하며, 아이들은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거나 버텨낼 힘이 없다. 그렇기에 나는 유년기의 두려움에 대해 스스로 면죄부를 준다. 그 시절, 자아가 확립되지 않은 여린 마음으로는 그런 두려움을 견뎌내는 것이 당연히 어렵지 않았겠는가.
어쩌겠는가.
성인이 된 이후로는 그런 나 자신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한다.
나는 더 이상 초등학생이 아니다. 이제는 친구의 비웃음이나 치기 어린 도발에 동요하지도, 응하지도 않는다. 때로는 화가 나기도 하지만, 그저 성가실 뿐이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이제는 물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겠노라고. 그리고 이 다짐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동네의 수영장을 찾기 시작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과연 내가 물 위에 떠서 ‘수영’이라는, 인류가 수천 년간 갈고닦아온 이 동작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 설레었다.
아마도 숨쉬기 연습부터 시작하겠지. 물속에서 “음파, 음파” 하며 호흡법을 익히는 내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마치 새로운 도전을 앞둔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뛰었다.
겨우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어린이 수영장을 발견했다. 작지만, 내게는 특별한 무대가 될 그곳에서, 나는 다시 두려움을 넘어서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