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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연 Sep 10. 2022

삶의 순환, 그 속에서

자연으로 돌아가신 할머니

추석 아침이었다. 최근에 쉬지 않고 계속 달려서인지 본가에 오자마자 긴장이 풀려서 몸살 기운이 올라왔다. 친척들을 보러 가는데도 몸에 열감이 가시지 않아 모자를 푹 눌러쓰고 졸면서 이동했다. 결국 큰집에 가서 뻗어버린 나는 혼자 조용한 곳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들었다. 한참을 자고 눈을 뜨니 편지하나가 놓여 있었다.


잠결에 인기척이 들리긴 했는데, 침대에서 일어나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 소리의 정체가 조카 녀석이라는 걸 알았다.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고 일어나 편지를 들고 조카에게 가는데 녀석이 꺄르르 웃으며 나에게 안겨왔다.

.

벌써 2년 전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말이다. 처음 가 본 장례식, 그리고 화장터, 그곳에서 한 줌의 재가 되어 나오신 할머니. 평생을 살아오며 단 한 번도 느낄 수 없었던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 그리고 부재. 24살에 처음으로 느낀 본 삶과 죽음의 그 종이 한 장 차이,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의 유한함을 눈앞에서 보고 알게 된 깨달음은 나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삶은 정말 유한한 것이구나. 그 유한한 삶 속에서 내가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나는 그 길로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하기 위해 혼자서 돈을 벌며 또다시 입시를 준비하여 결국 그토록 원하던 연극영화과에 들어갔고 지금까지 평생을 원하던 꿈을 키워갔다. 이때까지 여러 필모그래피를 쌓으면서, 또 여러 성과를 내면서 늘 마음 한편에  모셔둔 할머니 생각이 났다. 할머니는 내가 TV에 나오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언제든 나를 볼 수 있게. 이제는 그럴 수 있는데. 할머니가 이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은 때때로 날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좋은 일이 일어난 날엔 ‘할머니가 계셨더라면 할머니에게 전화를 했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할머니가 없는 명절에 적응하기 힘들어했다. 특히 코로나 때문에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이지 못하게 되면서 할머니의 빈자리는 더욱더 크게 느껴졌다. 아직까지도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나는 명절이나 가족행사가 있는 날마다 할머니의 부재를 느끼곤 화장실로 가서 눈물을 훔쳤다.
이번엔 처음으로 거리두기가 없는 명절이었다. 그간 코로나로 모이지 못했던 조카들까지 모두 모이며 집이 아주 북적북적했다. 적막했던 이전 명절과는 다르게 둘째 조카의 울음소리부터 유치원에 들어간 첫째 조카의 웃음소리까지 조용할 틈이 없었다. 조카들은 어찌나 에너지가 넘치는지 낯도 가리지 않고 내게 다가와 안겼고 손을 붙잡고 함께 놀자며 보챘다.

아이들은 봄에 피어난 새싹 같았다. 힘차게 흙을 뚫고 나와 작지만 단단하고 싱그럽게 서있는 새싹들 말이다. 이 아이들도 커서 언젠가는 학교에 들어가고, 사춘기를 맞이하고, 성인이 되어 하나의 꽃을 피우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할머니의 생각이 났다. 고목나무가 되어 평생을 서 있다가 이제는 자연의 품으로 돌아간 할머니.

할머니의 부재에 마냥 슬퍼했다. 아직도 할머니의 이야기가 나오면 눈물이 먼저 나고, 할머니의 묘 앞에 가면 아직도 울음을 멈추지 못할 것 같아 일부러 외면했다. 그런데 이번 명절에는 의도치 않게 그런 할머니를 잠시 접어두었다. 누군가의 죽음 뒤에 따른 누군가의 탄생 덕분이다. 할머니에게 ‘우리 똥강아지’였던 나는 이제 그런 별명을 듣기에 무색해질 만큼 어른이 되었고 그 자리에 조카들이 들어섰다.

나는 이제야 할머니의 부재를 조금씩 인정하는 중이다. 고목나무였던 할머니는 자연의 이치에 맞게 다시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신 것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말이다. 이제는 새로운 새싹들이 돋아나 터전을 이루고 있고 나 또한 어린 묘목에서 한참을 자라나 열매를 영글어가려는 나무가 되었다. 그리고 내 위에 또 다른 고목나무들이 내가 잘 자랄 수 있게 바람을 막아주시고 계신다. 우리는 순환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다만 절대로 잊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생겼다.
첫째, 내가 고목나무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기 전, 삶을 뒤돌아봤을 때 후회하지 않을 것.
둘째, 늘 비바람을 막아주시는 지금의 큰 어른들께, 늘 존재의 소중함을 잊지 말고 최선을 다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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