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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연 Jul 12. 2023

옆 침대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죽음 앞에서

옆 침대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미 돌아가신 채로 응급실에 실려 오셨다. 잠시 뒤 보호자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아내 분으로 보이는 할머니는 다급했던 상황을 온몸으로 설명해 주듯 집에서 나온 옷차림 그대로, 목이 다 늘어난 티에 신발을 이리저리 구겨 넣은 채 나타났다.
의사가 할머니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이미 심장이 멈춘 것 같습니다.”
할머니는 얼이 빠져도 한참 빠져 있었다. 심장이 멈췄다는 의사의 말을 이해할 정신조차 없어 보였다.
“심장이 멈추면 어떻게 되는데요?”
의사가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의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내 귀에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꽂혔다. 할머니의 울음소리를 듣자마자 내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냥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이건 사람이 낼 수 있는 소리일까 의문이 드는, 그러니까 애간장이 끓다 못해 모두 타들어갈 때나 낼 법한 처절한 울음소리였다.

내가 검사를 하러 간 사이 할아버지는 의미 없는 심폐소생술을 받으러 갔다. 할머니의 서글픈 울음소리는 그치지 않았고 내가 퇴원할 때쯤 할아버지는 사망선고를 받았다.



침대에 누워 의미 없이 인스타그램 피드를 내리는데 메멘토 모리에 대해 설명하는 글이 보였다. 대충 죽음을 기억하라는 둥, 인생이 유한하다는 둥, 평소에 봤다면 잠깐 가슴 벅차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뒤돌아서면 잊어버릴 그런 내용의 글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이야기가 좀 달랐다. 얼마 전에 들었던 할머니의 울음소리가 귀에서 되살아났다.

책에서 그런 문장을 본 적 있다. ‘죽음을 슬퍼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 사람과 있을 때만 존재했던 나의 죽음을 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할머니의 울음소리에는 얼마나 많은 세월이 담겨 있었을까. 그 눈물에는 수십 년을 함께 보내온 할아버지와 있을 때 비로소 존재했던 자신의 모습을 떠나보내는 그 슬픔을 토해내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홀연히 떠나갈 줄 알았을까. 그렇게 갑작스럽게 떠나보내야만 할 줄 알았을까. 서로 사랑하며 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말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내 마음이 좀스러워서 한없이 누군가를 품어 주고 사랑할 만큼 너그럽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미워하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언젠가 한없이 마주하게 될 나의 죽음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그러자고 다짐했다.

여행은 돌아오기 위해서 떠나는 것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온다. 삶도 그러하다. 태초에서 시작하여 다시 태초로 돌아갈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아니 어쩌면 살아가는 내내 그 사실을 잊고 지내다가 후회하다가 마지막 숨을 서글프게 내뱉는다. 아무것도 가져갈 수 있는 게 없는데, 뒤돌아보면 뭘 그리 항상 쥐고만 살아갔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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