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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디아 Feb 13. 2022

내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기


 읽고 난 후 사랑에 빠지는 그런 그림책이 있다.

•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는 책

• 나를 나 답게 해주는 책

• 나를 더 사랑하게 만드는 책


<프레드릭>이 나에게는 그런 책이다.


 그림책을 읽는 묘미 중 하나는 책의 앞/뒤 표지와 면지, 속표지까지 모두 관찰하는 것이다.


 책 표지속 프레드릭은 붉은 양귀비 꽃을 들고 있다. 양귀비는 색상에 따라 꽃말이 다른데, 붉은 양귀비의 꽃말은 ‘몽상, 위안, 위로’ 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리고 뭔가 졸린 듯한 눈을 하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 입은 웃고 있는 프레드릭.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출신의 레오 리오니작가.


  『조금씩 조금씩』, 『으뜸 헤엄이』, 『프레드릭』, 『새앙쥐와 태엽쥐』로 네 번씩이나 칼데콧 상을 수상한 레오 리오니... 그의 작품들 속에서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조사에 의하면 어린이는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아이들의 이야기는 읽고 싶어하지 않고, 또 여자아이는 남자아이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도 읽지만, 남자아이는 여자아이의 이야기를 꺼린다고 합니다.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면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르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의 그림책 속에서는 어른들은 끔찍하게 생각하는 그리미와 같은 생쥐가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천 년 전의 이솝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어쨌든 20세기의 레오 리오니의 작품 속에서는 이솝의 ‘우화’에서 등장했던 여러 동물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채널예스


속표지 속 프레드릭의 뒷모습


프레드릭은 늘 혼자 무리와 동떨어져있거나, 등을 돌리고 있고 다른 들쥐들과는 다른 곳을 보고 앉아있다.



 다른 들쥐들은 눈을 똥그랗게 뜨고 겨울 식량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프레드릭은 겨울이 오기 전 햇빛을 쐬며 햇살을 모으고 돌 위에 올라가 풀밭을 내려다 보며 색깔을 모았다. 그리고 혼자 눈을 감고 이야기를 모았다.


 겨울이 오자 들쥐가족은 그간 모은 먹이에 의지해 자신들을 괴롭히던 여우와 고양이 이야기를 하며 지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먹이가 다 떨어지고 찬바람을 견디며 더이상 재잘대고 싶지 않게 되자, 프레드릭에게 물었다.

“네 양식은 어떻게 됬니?”


 프레드릭은 커다란 돌 위에 올라가서는 그간 모은 햇살과 색깔과 이야기를 나누어주었다. 이 때 처음으로 프레드릭의 눈이 똥그래졌다.


프레드릭이 햇살과 색깔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의 다른 들쥐가족들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들쥐들이 처음엔 프레드릭의 관점에서는 등을 돌리고 서있다가 점점 자세를 프레드릭쪽을 향해 틀어 그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어 있는 듯 했다. 그리고 들쥐들의 뒷모습은... 어디서 많이 봤다했는데?

앞전에 보던 프레드릭의 뒷모습과 넘 똑같은 것.

여기서 나는 뭔가 맘이 찡하고 뭔가 짜릿했다.



“프레드릭, 넌 시인이야!”

“나도 알아.”


 어쩌면 개미와 베짱이의 현대판이라고 해석되는 이 책을 읽고, 사람들은 우정, 이웃사랑, 지혜, 이상의 중요성 그리고 공동체에 대해 배운다. 레오 리오니는 자아를 발견하는 방법은 프레드릭처럼 몽상을 통해서도 가능하다는 메세지또한 책을 통해 전하고 있다.




그림책의 / 면지는 이렇게 글자들로 가득하다. 책을  읽고 보니 프레드릭이 열심히 모은 이야기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프레드릭이라고 씅져있는거보니, 유명한 시인이 될걸 미리 알고 싸인 연습을 한걸까? 아님 프레드릭 자신으로 가득찬 프레드릭을 표현한걸까?



책의 뒷 표지는 앞표지의 프레드릭의 모습을 뒤에서 바라본 그림이다. 처음에는 프레드릭은 뒤돌아 서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걸까 궁금했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시선은 들쥐 가족들이 프레드릭을 보던 시선이 아니었을까 생각이들었다.


 들쥐들은 늘 자신의 세계에, 몽상에 빠져있는 프레드릭의 뒷모습을 볼 뿐이었다. 들쥐가족들은 어떤생각을 했을까. 책에는 들쥐가족들의 생각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넌 왜이렇게 게을러? 너는 현실감이 제로야 라든지?프레드릭을 향한 불평의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뒷 부분에 프레드릭의 양식은 햇살과 색깔과 이야기임을 인정해주고, 시인이라 칭찬해준다.


그냥 프레드릭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존중해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보는 동안 불편한 건 내 몫이었던 것 같다. 다른 들쥐들이 프레드릭을 불평하지 않을까? 자기들만 더 많은 일을 하니 불공평하다 여기지 않을까? 게으르다 생각하지 않을까?


 ...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런 생각은 나 스스로가 다른 사람들이 나를 향해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었다. 그래서 프레드릭을 존중해주는 들쥐가족들이 뭔가 고맙고 이 책이 따듯하게 느껴지기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도 나만 그런게 아니구나. 나도 존중받을 만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얼마전 남편이 나보고 나는 쿠바에서 태어났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 이유를 너무 알았다. 늘 마냥 꿈꾸는 몽상가 같이 여유로워만 보이는 나를 오랫동안 지켜본 남편의 말이다. 읽고, 쓰고, 음악듣고 그림그리는 나를 보는 남편은 언젠가 ‘나도 당신처럼 살아보고 싶다. 부럽다.’ 고 말했다. 뭐 약간 말에 가시가 있긴 했다. 근데 뭐. 다 본성대로 사는거기에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자기 자신이 ‘시인’인 줄 알았던 프레드릭은 자기가 누구인줄 명확하게 알았기에 다른 들쥐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이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았다.


 영화 ‘패터슨’의 패터슨시에 사는 패터슨은 자신이 시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다. 자신은 그저 버스기사일 뿐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머릿속에 가득한 시를 그의 비밀노트 속에 꽁꽁 숨겼다.


 자기가 누구인지 알고 인정하는 것은 참 쉽지 않다. 낮은 자존감 때문일 수도 있고, 상황과 환경으로 부터 빚어진 자기 이해의 오류 때문일 수도 있고, 수많은 페르소나로 인해 가려진 그림자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림책을 통해 나는 나를 자주 만나게 된다. 햇빝에 몸을 쬐듯 그림책을 나에게 쬔다. 햇빛에 몸이 따듯해지고 움크러든 어깨를 쫙 펴듯, 그림책을 나에게 쬐어보면 어둡고 추운 나의 내면이 빛 가운데 드러나며 마음이 따듯해지고, 움크러든 나의 자아가 기지개를 쫙 펴고 바로 서게 된다. 진짜 내를 바로 보고, 바로 서는 시간이 된다. 그래서 나는 그 시간을 그림책 테라스을 부른다.


 앞으로 더 자주 그림책을 소개하려고 한다. 사실 잘하고 싶은 마음에 계속 미뤘다. 근데 그냥 잘하려고 말고 부지런히 해보려고 한다. 프레드릭처럼 나도 나의 아카이브에 차곡차곡 나만의 이야기를 모으려고 한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그림책을 통해 위로와 격려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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